40대 후반의 이모 씨는 최근 아내 눈치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퇴근 후에는 설거지, 쓰레기 처리 등 집안일을 ‘스스로’ 찾아서 한다. 4개월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평소 같으면 PC방에서 밤새우느라 외박하고, 월급을 받아도 “용돈이 부족하다”며 쥐꼬리만한 생활비조차 주다 말다 하던 이씨였다. 그러던 그가 180°로 태도가 바뀐 건 전업주부이던 아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이후 아내 입에서 습관처럼 흘러나오던 ‘이혼’ 소리가 싹 사라진 게 오히려 이씨를 더 불안하게 했다.
“아내가 버는 돈이 내가 주던 생활비보다 많다. 그 돈으로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 수 있으니까 속으로 벼르는 것 같다.”
자신이 달라지지 않으면 언제든 이혼당할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이씨는 “이 나이에 이혼하는 건 생각만 해도 두렵다”고 말했다. 그는 주말이면 예전과 달리 아이와 아내 곁을 맴돌며 관심을 끌려고 안간힘을 쓴다.
최근 미국 여성 언론인이 쓴 ‘남자의 종말’이 국내에 소개돼 화제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서점가에는 ‘일회용 남자’ 등 위기에 처한 남성 이야기를 다룬 책이 쏟아졌다. 급기야 최근에는 “남편과 아버지 기를 살려 가정을 바로 세우겠다”며 캠페인에 나선 여성단체도 등장해 주목을 끌었다.
이혼이 두려워 떠는 남편들
요즘 우리 사회 중년남성은 직장에서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면서 위기감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이 술자리에서 자주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나이 들면서 필요한 5가지’가 그것. 남성의 경우 첫째 마누라, 둘째 아내, 셋째 애들 엄마, 넷째 집사람, 다섯째가 와이프다. 반면 여성은 첫째 딸, 둘째 돈, 셋째 건강, 넷째 친구, 다섯째 찜질방이다. 남성들은 “아내에게 필요한 다섯 가지 가운데 맨 끝에도 ‘남편’은 없다”며 술을 들이킨다.
그런가 하면 중년여성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유행한 ‘삼식이 시리즈’는 최근 진화한 형태로 등장했다. 남성이 은퇴 후 집에서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먹으면 ‘삼식이새끼’, 밖에서 세 끼를 전부 해결하면 ‘영식님’, 집에서 세 끼와 간식까지 챙기면 ‘종간나새끼’라는 것.
술자리나 모임에서 회자되는 우스갯소리 외에 ‘위기의 중년남자’ 시대가 다가온 걸 실감 나게 보여주는 것이 통계청의 이혼 통계 추이다. 20대 젊은 층의 이혼건수는 2001년 1만4474건에서 2006년 8414건, 2011년 5244건으로 대폭 줄어든 반면, 40~50대 연령층의 이혼건수는 같은 기간 각각 5만9975건, 6만4649건, 6만9469건으로 10년 사이 1만 건 가까이 증가했다. 더 큰 문제는 전체 이혼율 가운데 이들 중년부부의 이혼이 차지하는 비율이 해마다 가파르게 증가한다는 점이다. 40~50대 이혼이 전체 이혼건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01년 45%, 2006년 52%, 2011년 61%였다. 지난해 이혼한 10명 가운데 6명이 40~50대였던 셈이다.
아내가 원하는 이혼이 압도적
한편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지난해 여의도본부에서 실시한 면접상담 1만1073건을 분석한 결과, 이혼 상담이 5177건으로 46.8%를 차지했다. 그중 40대 여성이 1435명, 남성이 268명으로 남녀 모두 40대의 이혼 상담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이 호소한 재판상의 이혼사유를 살펴보면, 남녀 모두 ‘기타 사유’가 가장 많았다. 여성의 경우 기타 사유로 경제 갈등, 성격 차이, 배우자의 생활무능력 순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그 외 남편 폭력, 남편 외도가 많았다. 남성의 경우 기타 사유로 성격 차이, 장기 별거, 생활양식 및 가치관 차이 순으로 나타났으며, 그 외 아내 가출과 아내 외도가 많았다.
중년부부의 이혼이 갖는 특징은 이혼을 요구하는 10명 가운데 8~9명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혼을 ‘당하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얘기다. 1995년부터 대한민국 남성의 고민을 상담해온 ‘남성의 전화’(소장 이옥이)는 한 달 평균 300여 건을 상담한다. 상담소 측에 따르면, 상담자 가운데 40~50대 중년남성이 70%를 차지한다. 10명 가운데 9명은 이혼 위기나 부부 갈등, 가정 폭력 등의 문제로 찾지만, 10명 가운데 1명은 이혼당한 남성들이 상담을 해오는 것.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살던 집에서도 맨몸으로 쫓겨났다” “너무 힘들어서 아내와 재결합하고 싶은데 연락도 못하게 한다” “일도 없고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됐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죽고 싶다” 등 구구절절한 사연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보이는 남성이 적지 않다.
직장에서 퇴직한 후 1년 만에 이혼당한 50대 초반 김모 씨는 “더는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갈수록 삶의 의욕을 잃어가고 있다. 월 200만 원 가까운 수입 가운데 절반을 중·고교생 두 아이의 양육비로 전처에게 보내지만 아이들을 만날 수가 없다. 전화를 걸면 전처는 “아이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김씨와의 만남을 가로막는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전처 집을 찾아갔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자 김씨는 홧김에 현관문을 발로 차고 소동을 피웠다. 전처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고 이를 빌미로 법원에서 접근금지명령 처분을 당한 김씨는 아이들 보기를 포기했다. 분노와 좌절감, 우울증에 시달리는 김씨는 외출은 물론,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한다.
결혼생활 20년 안팎의 중년부부가 이혼할 경우, 특히 중년남성에게 여러 문제가 생긴다. 이옥이 소장에 따르면 “내가 그동안 누굴 위해 뼈 빠지게 일했는데 이제 와서 아내와 자식이 나한테 이럴 수 있나” 하는 억울함과 분노감 외에 “외롭다”라고 하소연하는 남성이 많고, 심하면 자살충동을 느끼거나 실제로 자살시도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
한편 중년부부가 이혼하면 대부분 기존 재산을 절반씩 나누게 된다. 이 때문에 이혼 후 쪼그라든 재산으로 셋집을 전전하며 살다 노후에 ‘홀몸노인이나 쪽방노인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을 느끼는 중년 이혼남도 적지 않다. 반면 이혼하면서 재산 절반을 차지한 중년여성은 남성에 비해 가사 도우미나 식당일, 간병인 등 상대적으로 일자리를 구하기가 수월한 편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쪼들릴 일이 과거 이혼녀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 그뿐 아니라 손자손녀를 봐주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고, 이혼 후에도 자식과의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고립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에 반해 이혼한 중년남성의 삶은 녹록지 않다. 중년남성이 이혼 ‘당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살펴보면, 그들이 처한 상황을 알 수 있다. 첫째, 재산분할로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것은 물론, 은퇴하면 그 나이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둘째, 평소 집안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식사를 해결하기가 어렵다. 셋째, 여성에 비해 병원 가기를 귀찮아하고 약 먹기를 소홀히 하는 남성의 특성 탓에 건강이 나빠지기 쉽다.
이혼 피해야 할 7가지 이유
넷째, 자녀와의 단절을 부른다. 흔히 자식은 부모가 이혼할 경우 평소 친밀도가 높은 엄마와는 가깝게 지내는 반면, 아빠는 잘 찾지 않는다. 다섯째, 손자손녀를 보기 어렵다. 여성은 이혼해도 맞벌이 자녀를 위해 손자손녀를 돌봐줄 수 있지만, 남성은 어렵기 때문에 자식이 아빠에게 아이들을 잘 맡기지 않는다. 여섯째, 부부동반 모임이나 동창 모임 등에 나갈 수 없어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여성이 이혼하면 “남편에게 문제가 있나 보다”라고 동정하는 경우가 많지만, 남성의 경우 친구 사이에도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 하는 눈총을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곱째, 자녀와의 단절과 사회적 관계의 단절은 우울감, 무력감, 외로움을 유발할 뿐 아니라 심하면 자살충동을 부른다.
이옥이 소장은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약자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여자 형제나 친구들을 만나 고민을 털어놓는 여성과 달리, 남성은 그런 소통 통로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 여성은 경제력이 떨어진 뒤에도 여전히 당당하게 살 수 있지만, 중년남성은 그야말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년남성이 이혼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평소 아내, 아이들과 대화를 자주 하고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서 끈끈한 애정과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중년남성이 회사 일이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걸 너무 못해서 나이 들어 이혼당하고 힘들고 외로운 상황을 자초한다”며 안타까워했다. ■ 인터뷰 ㅣ 서울가정법원 가사조정위원회 이윤수 위원장 “‘죽어도 이혼 못 해’…남자가 매달리고 읍소”
전체 이혼건수에서 중년부부 이혼이 차지하는 비중이 해마다 큰 폭으로 늘면서 이들의 이혼이 최근 가정법원의 이슈가 될 정도다. 10여 년간 서울가정법원 가사조정위원으로 활동해오다 지난해부터 위원장직을 맡은 이윤수(비뇨기과 전문의·사진) 씨는 “10년 전부터 60대 황혼이혼이 우리 사회에서 문제로 떠올랐지만 요즘은 황혼이혼 연령이 점차 낮아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혼 조정을 맡은 조정위원 눈에 비친 중년부부의 이혼 풍경이 궁금하다.
“정확한 통계를 내보진 않았지만, 중년부부의 이혼 10건 가운데 9건이 여성 쪽에서 이혼을 청구한다. 이혼을 결심한 이유야 여럿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여성 쪽에서는 ‘더는 네 꼴을 못 봐주겠다’는 것이고, 남성은 ‘집 한 채뿐인 재산을 반으로 나누면 그걸로 어떻게 사느냐, 죽어도 이혼 못 해주겠다’고 매달리며 읍소하는 모습을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다.”
40~50대 이혼사건조정 사례 가운데 이혼당할 위기에 처한 남성의 사례로는 어떤 것이 있었나.
“은퇴한 지 2년 된 50대 중반 남성이 아내에게 이혼 요구를 받았다. 남성이 평생 금융계에서 일하다 보니 꼬장꼬장한 성격에다 숫자에도 밝아 아내가 쓰는 생활비를 일일이 검사하고 따지고 잔소리를 해대자 여성이 폭발한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는 맞벌이 부부인 아내가 일 때문에 야근이나 회의로 늦게 귀가하자 남편이 외도를 의심해 통화내용을 몰래 녹취하는 등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착하다 이혼소송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그 밖에 20년을 함께 산 부부가 이혼하겠다는 또 다른 이유가 있나.
“겉으로는 ‘성격 차이’ 때문에 이혼한다지만, 조정 과정을 거치다 보면 진짜 이유가 ‘섹스리스’에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여성은 중년이 되면 성욕이 떨어지는 반면, 남성은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욕이 높기 때문에 성생활이 부부 사이에 트러블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이혼을 요구하는 여성은 ‘넌 섹스만 먹고 사냐?’, 남성은 ‘그럼 밥만 먹고 사냐?’며 다투기도 한다.”
한국성과학연구소(소장 이윤수)가 전국 기혼남녀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결혼생활만족도를 묻는 질문에서 남성은 83%가 만족한다고 응답한 반면, 여성은 62%만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결혼생활이 불만족스러운 이유를 묻는 질문에서는 남성의 34%가 ‘성관계 불만’을 꼽은 반면, 여성은 18%에 불과했다. 이 위원장은 “부부 사이에 성관계가 원만하지 않다 보니 서로 불만과 짜증이 쌓이고 틈이 점점 벌어져 나중에는 ‘밥 먹는 모습도 꼴 보기 싫다’며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혼 ‘당하는’ 남성이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뭔가.
“평소 가정보다 직장생활을 더 중요시 여겨 가족에 소홀하고 그 습관을 퇴직 후까지 버리지 못하다 보니 문제가 발생한다. 그동안 여성의 인식은 엄청나게 변했는데 변화에 둔감한 남성은 여전히 집에서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TV 리모컨이나 만지작거리고 잔소리를 해대니까 여성이 더는 못 살겠다고 반기를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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