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성마비 아들 둔 딸의 짐 덜어주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20일 03시 00분


포천서 70대, 외손자와 목매… “미안하다… 행복해라” 유서
이웃들 “평소엔 말 없어도 손주와 다정하게 지낸 분이…”

김모 씨(72)는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열두 살 난 외손자를 유난히 아꼈다. 외손자가 태어난 뒤 김 씨는 그의 후견인이었다. 선천성 뇌성마비 1급인 외손자는 혼자 걸어 다니거나 밥 먹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거동이 불편했다. 김 씨는 수시로 외손자를 데리고 다녔다. 젖먹이일 땐 유모차에, 걷기 시작할 땐 자전거에 태우고 동네 구경을 다니는 게 그가 노년에 찾은 행복이었다.

김 씨는 뇌성마비 아들을 돌보느라 고생하는 딸을 안타까워했다. 딸은 손자의 분신처럼 살며 모든 일상을 함께해야 했다. 손자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딸은 점점 지쳐갔다. 김 씨는 어떻게든 딸을 돕고 싶었다.

결국 김 씨는 18일 외손자를 데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이날 오후 2시경 경기 포천시 영북면의 한 주택 우사(牛舍)에서 김 씨는 외손자 A 군과 숨진 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두 사람은 2m 높이의 우사 대들보에 맨 나일론 끈으로 목을 매 숨진 상태였다. 두 시신은 김 씨의 아들이 발견했다. 현장에선 이런 내용의 유서가 나왔다.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먼저 간다’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김 씨의 딸 부부는 김 씨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인 인근 소흘읍에 살면서 평소 주말이면 A 군과 함께 친정 집에 와 묵고 간 것으로 알려졌다. 주중에는 김 씨가 딸집을 찾아 A 군과 함께 지내곤 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사건 당일도 김 씨의 딸은 친정 집 인근 교회에 가려고 아버지 김 씨에게 A 군을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 씨의 부인은 친척 결혼식에 가고 없어 집에는 김 씨와 A 군만 남아 있었다.

경기 포천경찰서 관계자는 “외손자 A 군에게서 목을 맨 흔적 외에 별다른 외상이 없는 것으로 봐서 김 씨가 A 군을 먼저 숨지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며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외손자가 딸에게 짐이 될까 봐 극단적 선택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은 가족의 진술과 유서 내용을 토대로 정확한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빈소에는 조문객들이 헌화한 국화꽃 사이로 고인이 된 김 씨와 손자 A 군의 영정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김 씨의 아들과 A 군의 아버지 등 2명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을 일일이 맞았다. A 군의 아버지는 빈소를 찾은 기자에게 “먼 길 오셨는데 슬픔이 너무 커서 뭐라 말씀드릴 여유가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친지와 지인들의 조문 행렬이 밤늦게까지 이어지면서 빈소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웃 주민들에게 김 씨는 무뚝뚝하지만 정이 넘치는 동네 할아버지였다. 주민들은 “평소 손자를 ‘귀염둥이’ ‘강아지’라고 부르며 그렇게 예뻐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한 조문객은 “할아버지는 평소 과묵하고 말이 없었지만 손자와 함께 있을 때는 다정다감한 여느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며 “딸을 생각하며 그렇게 예뻐하던 손자와 함께 생을 마감해야겠다고 마음먹기까지 그 마음이야 오죽했겠느냐”며 울먹였다.

포천=조영달·서동일 기자 dalsar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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