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한 고등학교는 지난해 전면 실시했던 교과교실제를 최근 사실상 포기했다. 현재는 원어민이 진행하는 영어회화와 제2외국어 수업만을 교과교실제로 운영한다. 이유는 이렇다.
이 학교는 지난해 교과목별 교과교실을 만들고, 수학 영어 등 주요과목은 학업수준에 따라 A, B, C반으로 나눠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이 자신만의 ‘맞춤형’ 시간표를 만들어 공부하면 학업능률이 오를 것으로 학교는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모인 A반과 달리 B, C반 학생들은 오히려 예전보다 수업분위기가 나빠진 것이다. 교실을 옮기느라 쉬는 시간 10분이 다 가버리는 바람에 쉬지 못하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수도 없게 된 학생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학생들이 여러 반으로 흩어지면서 생활지도가 어려워지자 수업을 빠지는 학생도 생겨났다.
교과교실제를 시행하고 사회, 과학 과목 등 만족도가 높은 수업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부정적인 면이 더 많다고 판단한 학교는 결국 교과교실제를 포기했다.
이 학교 2학년 Y 양은 “교과교실에 가도 과거랑 똑같이 수능 진도에 맞춘 문제풀이 수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수준별로 반이 나뉘면 성적이 드러나는 느낌이라 싫어하는 학생도 적잖다”고 전했다.》
최근 중고교에서 학생들이 교과목별로 정해진 교실을 찾아다니며 수업을 받는 교과교실제가 대폭 확대됐지만 현장의 반응은 썩 좋지 못하다. 학생의 학업능력과 교과목별 특성에 맞는 다채로운 방식의 맞춤형 수업을 할 수 있는 점 등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부작용이 만만치 않은 까닭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교과교실제를 2014학년도까지 전국 중고교에서 전면 실시하겠다고 밝혔지만, 적잖은 교사와 학생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 수업효과 있을지 몰라도… “생활지도 어려워”
교사들은 교과교실제가 실시되면서 이전보다 학생지도가 어려워졌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 강남의 A고는 교과교실제를 실시하면서 담임교사가 확인해야 하는 출석부가 담임출석부 외에 이동수업 출석부까지 10개가 넘는다. 학생들이 국어 영어 수학 수업은 3개 반씩 총 9개 수업으로 나뉘어 들어가는 데다 사회과목은 한국지리, 한국사, 사회문화 등으로 나뉘어 수업을 듣기 때문이다.
담임교사들은 조례와 종례 외에는 학생들이 다른 교실로 흩어져 수업을 듣기 때문에 학생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학생들이 제대로 수업을 듣는지 확인하려면 쉬는 시간마다 이동수업 출석부를 모두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다.
실제로 수업시간마다 구성 학생 수가 달라 교사들의 인원파악이 허술해지는 틈을 타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 일도 적잖이 일어난다.
A고의 한 교사는 “매시간 출석 확인을 하려면 수업시간 5분 이상을 허비하게 된다”면서 “지정석을 정해놓으려 해도 많은 학급에서 동시에 사용하는 교실이라 쉽지 않다”고 말했다.
대전의 고2 김모 군은 “좀 만만하다 싶은 선생님의 수업이거나, 출석체크를 잘 안하는 시간에는 학생들이 몰래 수업을 빠지고 다른데 숨어있는 경우도 많다”고 귀띔했다.
○ 매시간 교실 돌고 돌고… “친구사귀기 어려워”
학생들은 교과교실제로 사실상 ‘학급’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교우관계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같은 학급 학생들이 함께 지낼 시간이 줄어들다보니 친밀감도 줄어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다는 것. 특정 장소에 모여 조회와 종례만 하고 계속 교과교실을 돌며 수업을 듣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서울의 한 여고 2학년 정모 양은 “교과교실제로 반이 나뉘어 생활하다 보니 1년 동안 같이 생활했지만 이름도 모르는 친구도 있다”면서 “‘고등학교 친구가 평생친구’라는 말이 무색해졌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고교 담임교사 B 씨는 “학교폭력문제로 학생지도가 더 중요해진 상황에서 담임교사가 학생들을 파악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점이 걱정”이라면서 “기존에도 과학실, 어학실 등은 있었는데 다른 과목까지 굳이 무리해서 확대해야 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수업장소만 교과교실로 바뀌었지 수업의 내용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서울의 한 여고 1학년 C 양은 “한국사수업은 수학교실에서, 국어수업은 영어교실에서 한다”면서 “쉬는 시간에 예·복습을 하는 기회도 버리고 교실 이동을 하지만 정작 수업 내용은 기존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편 전용교실에 전자칠판, 각종 교구 등이 갖춰져 있지만 정작 수업에 활용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대입을 대비한 문제풀이식 수업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부산의 한 고교 2학년 김모 양은 “수행평가나 시험을 볼 때 자료로 찾아볼 수 있도록 영자신문이나 영어책들이 영어교과교실에 비치되어 있지만 정작 이용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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