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저녁 조성민 씨(40·사진)는 여자친구 박모 씨(41)의 서울 강남구 도곡동 SK허브프리모 오피스텔에서 박 씨와 소주 3병을 나눠 마셨다. 박 씨는 술자리에서 조 씨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6일 0시 5분경 지인을 만나러 외출했다. 홀로 남은 조 씨는 6일 0시 11분경 어머니에게 ‘저도 한국에서 살길이 없네요. 엄마한테 죄송하지만 아들 없는 걸로 치세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5분 뒤 박 씨에게 ‘내 인생에 마지막이 자기와 함께하지 못해서 가슴이 아프다 꿋꿋이 잘살아’라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남겼다. 박 씨는 ‘좀 이따 들어가겠다’라고 답했다.
박 씨가 외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조 씨는 욕실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경찰은 폐쇄회로(CC)TV를 통해 박 씨가 0시 5분에 외출했다가 오전 3시 40분에 돌아온 사실을 확인했다.
조 씨는 휴대전화 대리점을 운영하는 박 씨를 3개월 전 사업 일로 만나 교제를 시작해 ‘와이프’로 부를 정도의 깊은 관계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피스텔 관리사무소 등에 따르면 조 씨는 박 씨의 오피스텔을 자주 드나들다 최근에는 오피스텔에서 머물며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은 조 씨가 자살한 것으로 보고 유족과 협의해 명확한 사인 규명을 위한 부검을 7일 실시할 예정이다.
○ 최진실에게 끝까지 미안해해
조 씨의 지인들은 “조 씨가 7월 시행 예정인 ‘최진실법’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전처에 대한 미안함이 컸는데 새해 들어 세간에 전처 이름이 오르내리자 더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일명 ‘최진실법’이라 불리는 친권 자동 부활 금지제는 이혼 후 단독 친권자로 정해진 부모의 한쪽이 사망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친권자로 자동 지정되지 않고 가정법원 심리를 거쳐 후견인을 정하는 제도다. 여성단체들은 조 씨와 최 씨 유족이 아이들 친권과 양육권을 놓고 다투자 공개적으로 조 씨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최진실법’이란 이름이 붙었다.
조 씨는 2000년 12월 최 씨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최정상 인기 배우와 유명 야구선수의 결혼인 데다 조 씨가 최 씨보다 다섯 살 연하여서 화제를 모았다. 부부는 2001년 아들 환희(12)를 낳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 씨는 2002년 12월 18일 “아내가 나의 외도를 의심해 친구 사이인 심모 씨의 집에 들이닥쳤다. 의부증이 심해 이혼하고 싶다”며 별거 중임을 밝혔다. 당시 둘째인 딸 준희(10)를 임신 중이었던 최 씨도 당일 기자회견을 열어 조 씨의 주장을 반박하다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이후 조 씨와 최진실가(家)는 재산 문제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
조 씨는 최 씨와 2004년 9월 협의이혼하는 과정에서도 크게 다퉈 왔다. 조 씨는 그해 8월 1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 있는 최 씨 집에서 양육권을 두고 다투다 최 씨를 폭행해 2개월 동안 잠원동 주택 반경 100m 내 접근 금지 처분을 받았다. 결국 최 씨가 조 씨에 대한 모든 소송을 취하하고, 조 씨가 친권과 양육권을 포기하기로 합의하면서 3년 9개월의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이혼 후에도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조 씨는 이혼한 지 1년도 안 된 2005년 7월 한때 친구 사이라고 주장했던 심 씨와 재혼했지만 2010년경 관계를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씨도 2008년부터 부모가 자녀의 성을 바꿀 수 있게 법이 개정되자마자 두 자녀의 성을 조씨에서 최씨로 바꿨다. 조 씨는 최 씨가 2008년 10월 자살한 뒤 자녀 양육권과 친권을 놓고 유족과 갈등을 빚다가 아이들의 외할머니에게 같은 해 12월 권리를 넘겼다.
○ 새로운 시작, 하지만…
조 씨는 최정상급 투수였다. 그는 신일고 시절 ‘코리안 특급’ 박찬호 선수를 앞서는 최고 투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조 씨는 1996년 고려대 졸업 후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와 계약금 1억5000만 엔(당시 약 13억5000만 원), 연봉 1200만 엔(당시 약 1억800만 원)에 7년 계약을 맺었다. 한국 대학 선수로는 최초로 일본에 직행한 사례다. 조 씨는 1998년 전반기에 7승을 거두며 다승 공동 1위로 올스타전에 감독 추천 선수로 출전했다가 팔꿈치 부상이 악화돼 내리막길을 걸었다. 결국 2002년 10월 계약 기간을 1년 남겨 두고 요미우리를 나왔다.
조 씨는 이혼 후 다시 야구선수로 돌아왔다. 2005년 ‘재활 공장장’으로 불리던 김인식 당시 감독의 도움으로 한화에 극적으로 입단해 등번호 99번을 달았다. 마지막 기회라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그간의 삶의 곡절과 부상을 이겨 내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3년간 35경기에 출전해 3승 4패 평균자책 5.09라는 초라한 기록만 남기고 2007년 은퇴했다. 이후 스포츠 매니지먼트사와 식품 온라인몰을 운영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조 씨는 2011년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프로야구 두산에 2군 재활코치로 입단했다. 하지만 두산은 지난해 11월 재계약을 포기했다. 두산 측은 “일본으로 연수를 가 실력을 키워 오라고 제안했지만 조 씨가 거절하고 스스로 사의를 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 씨의 지인은 “조 씨가 구단의 지원 없이 자비로 연수를 가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이는 사실상 해고나 다름없다”고 전했다.
조 씨는 두산과 틀어진 직후인 11월 3일 도곡동의 한 선술집에서 친한 동생인 김모 씨(33)와 주먹다짐을 벌여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2008년과 2010년 야구 해설 경험을 토대로 해설위원이 되려고 했던 조 씨에게 이 사건은 치명타가 됐다. 최근 조 씨를 만난 한 방송 관계자는 “조 씨가 방송을 쉰 지 오래돼 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방송 복귀가 쉽지 않을 것으로 봤다”고 전했다. 여러모로 절망감에 빠져 있던 조 씨는 주변에 와이프라고 소개했던 박 씨에게서 이별 통보를 받자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
6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대안암병원에 차려진 조 씨의 빈소에는 야구계 동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1973년생 동갑내기 박재홍 선수는 “최근 카카오톡 프로필에 ‘이 또한 지나가리’란 문구를 적는 등 조금 힘들어 보였다”며 안타까워했다. 상주인 조 씨의 어린 두 자녀는 이날 오후 6시경 검은색 후드티를 입은 채 굳은 얼굴로 지인들과 함께 빈소에 도착했다. 남매는 친조부모와 얘기를 나누고 조문객들을 맞다가 오후 10시경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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