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준비물 사라고 예산 줬더니 교사용 슬리퍼-아이스크림 구입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14일 03시 00분


상당수 학교 최대 30% 전용

서울 동작구의 A초등학교. 학생들의 학습준비물을 구입하는 용도로 지난해 서울시교육청과 서울시로부터 3500만 원가량을 지원받았다. 실제로 이 학교가 학습준비물로 쓴 돈은 2600만 원 정도에 그쳤다.

집행명세에 대한 감사는 없었다. 그래서 남은 돈의 행방이 묘연하다. 그나마 학습준비물에 썼다는 2600만 원 중 780만 원(30%)가량은 교사용 사무용품, 청소용품 같은 엉뚱한 곳에 지출했다. 이 학교 B 교사는 “교사 사이에선 학습준비물 예산을 ‘눈먼 돈’으로 부른다”고 전했다.

지방자치단체와 시도교육청이 공동 부담해 2011년부터 일선 학교에 지급하는 학습준비물 예산의 상당액이 엉뚱한 곳으로 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교육청의 ‘학습준비물 지원계획안’에 따르면 학습준비물은 학교 수업을 받을 때 학생이 사용하는 소모품을 말한다. 도화지, 찰흙, 색종이, 마분지, 크레파스가 여기에 해당한다. 서울의 경우 지난해 지원 총액은 185억 원이었다. 공립초등학교 553개교에 1인당 3만 원씩, 중학교에는 국·공·사립중 379개교에 1인당 1만 원씩이다. 올해는 1인당 5000원씩 늘릴 예정이다.

본보가 입수한 교육과학기술부의 ‘2011년 학습준비물 예산 사용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상당수 학교가 해당 예산에서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30%를 다른 용도로 지출했다. 서울시내 초등학교 중 31개교, 중학교 중 27개교를 무작위로 뽑아 조사한 결과다.

용도 외 지출 품목에는 △교사용 사무용품 △제본기 코팅기 복사기 △디지털 교수학습 자료 △복사용지 △청소용품이 많았다. 일부 학교는 교육방송 수신료로 쓰거나 △커피 등 다과류 △교사용 슬리퍼 △아이스크림을 사는 데 지출했다.

학교들이 물품을 많이 구입하는 인터넷 사이트 ‘나라장터’를 본보 취재진이 검색한 결과도 보고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CD 케이스나 USB 연장선을 학습준비물 비용으로 구입했다.

본보 취재진이 서울 43개 공립 초등학교 교장 또는 교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예산을 투명하게 집행한다는 응답자는 19%에 불과했다. C 교장은 “일부 학교는 학습준비물 예산으로 회식비용을 충당한다”고 전했다. D 교감은 “학습준비물 예산으로 교사들에게 수고비를 준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사정이 이렇지만 지출명세의 관리는 허술하다. 서울시교육청은 개별 학교가 많이 쓴 비용을 제출받지만 일일이 점검하기는 역부족이다. 이 자료도 학교 측이 직접 작성하므로 신뢰도에 의문이 제기된다. 많은 학교 관계자들이 학습준비물의 정의조차 모르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본보 설문 대상자의 58%는 ‘학교 비품과 학습준비물의 차이를 잘 모른다’고 답했다.

이경자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대표는 “연말만 되면 학교마다 예산이 남아돌다 보니 있던 학습준비물을 버리거나 심지어 태워버리느라 난리”라며 “교사의 양심에 맡기기엔 한계가 있으므로 처음엔 예산을 적게 배정하고 더 필요하면 추가로 지급하는 식의 탄력적인 운용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김장희 인턴기자 이화여대 국문과 4학년
#학습준비물#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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