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은 신앙에 의지해 새 삶을 살려고 많이 노력했다. 하지만 주변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형님의 이름값을 이용해 이득을 보려는 사람도 많았다. 수사기관에서는 색안경을 끼고 뭐든지 꼬투리를 잡았다. 김태촌을 잡으면 큰 실적이 되기 때문이다. 형님은 희생양이었다.”
상주 리본을 단 한 중년 사내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때 ‘한국 최고 깡패’로 불리던 김태촌(향년 64세) 씨가 사망한 1월 5일 밤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첫날임을 감안해도 문상객이 많지 않았다. 적막한 빈소 풍경은 김씨의 쓸쓸한 말로를 말해주는 듯했다. 장례식장 안팎에 배치된 경찰 병력과 악머구리 끓듯 하는 언론사들의 취재 경쟁이 없었다면 ‘보스’ 빈소인 줄 몰랐을 것이다.
김씨 아우(옛 부하)들이 상주 자격으로 손님을 맞았다. 그들은 오래전 독립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사업가로 성공한 사람도 있고 여전히 조직과 관련된 사람도 있다. 김씨를 두 차례 인터뷰했던 기자는 조문한 후 그들 중 몇 사람과 동석해 고인에 대한 추억담을 나눴다. 건달세계에 청춘을 묻었던 그들에게 김씨 죽음은 한 시대의 종언이었다. 시퍼런 ‘연장질’과 잦은 옥살이로 대변되는 ‘질풍노도’ 시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연장질과 옥살이 시대 막 내려
정치권 표현을 빌리자면, 김씨는 구시대 막내였다. 신시대 주먹들은 계보나 족보에 관심 없다. 이 세계의 실상을 아는 사람들은 김씨 사망으로 국내 주먹계 판도가 바뀔 것이라는 일부 언론 보도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김태촌 시대’는 진작 끝났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의 설명과 달리 그가 이끌던 범서방파는 오래전 와해됐다. 허깨비만 남았을 뿐이다. 도대체 어느 조직이 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두목이 35년 동안 옥살이를 하는데….
김태촌 씨는 필생의 라이벌인 조양은 씨와 더불어 제4세대 주먹의 간판이라 할 만하다. 현재 60대 초·중반인 4세대 주먹들은 윗세대 계보를 이으면서도 계보를 파괴하는 이중적 면모를 보였다. 주먹계의 전통 질서를 무너뜨리고, 회칼로 무장한 조직폭력 시대를 연 것이다.
동서고금을 떠나 권력과 명예는 수도를 장악한 자가 차지한다. 모든 혁명과 쿠데타의 최종 목표는 수도를 점령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직종이 그렇다. 서울이나 서울 근처에 근무하면 성공한 사람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지방에 머무르면 빛이 나지 않는다. 주먹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름난 주먹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활약했다.
8·15 광복을 출발점으로 삼으면, 국내 1세대 주먹의 대표 주자는 김두한, 이정재, 시라소니(본명 이성순), 이화룡이다. 일제강점기 명실상부한 조선 최고 주먹이던 김두한은 해방 공간의 아수라장에서 대한청년단의 감찰부장을 맡아 좌익 척결에 앞장섰다. 김두한이 정계로 진출한 뒤 서울 주먹계의 최강자로 등극한 사람은 씨름선수 출신 이정재였다. 이북 출신 이화룡이 이끌던 명동파의 파워도 만만치 않았으나 자유당 실력자들과 결탁한 이정재의 동대문사단(혹은 화랑동지회)에 밀렸다. ‘싸움의 달인’ 시라소니는 이화룡과 가깝기는 했으나 특정 계파에 속하지 않은 채 리베로로 활동했다.
1세대 주먹이 퇴조한 계기는 이정재의 죽음이었다. 5·16 직후 군사정부는 깡패 소탕에 나서 주먹들을 줄줄이 잡아들였다. 이정재는 정치깡패라는 오명을 쓴 채 형장 이슬로 사라졌다. 군사정부 실세의 도움으로 중형을 면한 이화룡은 주먹계에서 은퇴한다. 이정재 부하들에게 집단린치를 당해 복수심에 불탔던 시라소니도 이정재의 사형에 충격을 받아 기독교에 귀의한다.
1세대 주먹의 몰락 이후 일시적 공백기를 맞았던 서울 주먹계는 신상사(본명 신상현)파라는 새로운 주인을 맞는다. 이화룡의 행동대장 노릇을 했던 신상사는 타고난 용맹성과 권력층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2세대 주먹의 선두주자로 떠오른다.
이정재의 동대문사단은 유지광과 ‘오따’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정종원 씨 세력으로 갈라진다. 정치권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유지광은 1세대 주먹과 3세대 주먹을 잇는 가교 노릇을 했다. 1988년 유지광이 죽은 후엔 정씨가 이정재 계열의 맏형 노릇을 한다. 정씨는 현재 신상사와 더불어 서울 주먹계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원로주먹이다. 맨손싸움 1인자 시라소니
2세대 주먹의 또 다른 축은 김두한 후계자인 조일환. 천안·아산이 본거지인 조씨는 충청권 주먹의 대부 노릇을 하면서 전국구 주먹으로 활약했다.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 당시 일본에 대한 항의 표시로 부하들과 함께 손가락을 자른 단지(斷指)사건 이후 주먹계 우국지사로 통했다. 현역에서 물러난 후 헌혈·장기 기증, 학교폭력추방 캠페인을 벌였던 조씨는 2009년 사망했는데, 말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주먹계 후배들을 대상으로 교화강연을 다녔다.
시라소니는 따로 후계자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주먹계에서는 조창조 씨를 시라소니 후예로 꼽는다. 족보상 적통은 아니지만 싸움기술 면에서 후계자로 보기에 손색없다는 평가다. 대구 출신인 조씨는 1960년대 후반 상경해 염천시장 상인협회 경비과장을 맡으며 주먹계에 발을 내딛었다. 일대일 싸움의 낭만이 있던 시절이다. 서울의 내로라하는 주먹들이 조씨 주먹에 모조리 나가떨어졌다. 조씨는 ‘시라소니 이후 맨손싸움 1인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타고난 싸움꾼이었지만, 세력이 크진 않았다. 시라소니가 그랬듯 조직을 거느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국구 주먹의 대명사인 그는 현재 대구·경북 주먹계의 상징적 인물로 많은 건달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하고 있다.
1960년대 서울 주먹계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전남 벌교 출신 문무회다. 유지광과 동세대인 문무회는 중앙정보부 수사관이면서 주먹계 최고 실력자였다. 1960년대 서울로 올라온 호남 주먹들 가운데 그의 도움을 안 받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말년의 김두한에게 경제적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3세대 주먹의 주축은 1960년대 후반 서울에 진출한 호남주먹들이다. 일부는 2세대 주먹과 시기적으로 겹치지만 연령대가 조금 낮다. 주먹계에서 나이는 서열을 정하는 주요 잣대 가운데 하나다. 뒷날 3대 패밀리 시대를 연 김태촌, 조양은, 이동재 씨의 선배 주먹들인 이들은 신상사파와 협조하거나 경쟁하면서 서울 주먹계의 한 축을 이뤘다. 송태준, 박종석, 정학모, 오종철, 오기준, 박영장, 이승완 씨 등이 대표 선수다.
무교동에 자리 잡았던 송태준 씨는 서울로 올라온 호남주먹들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번개’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박종석 씨는 계보상 김태촌 씨 대선배로 1989년 김씨가 조직한 신우회 회장을 맡는 등 호남주먹의 대부로 통했다. 1988년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 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야쿠자 보스와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대한태권도협회 전무를 지내며 태권도계 실세로 통했다.
대학 재학 중 ‘태권도 주먹’으로 이름을 떨친 정학모 씨는 일찍이 주먹계를 떠나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김대중 정부 때 김홍일 씨와의 친분 탓에 ‘전국 최고의 실세 주먹’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모 스포츠단 사장과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조양은 씨의 직계 선배인 오종철 씨는 박종석 씨와 더불어 1970년대 초반 재경 호남주먹계의 양대 산맥이었다. 1976년 무교동 엠파이어빌딩 주차장 부근에서 김태촌 씨 부하들에게 낫과 칼로 하체를 난도질당하는 큰 부상을 입은 후 주먹계에서 잊혀진 존재가 됐다.
오기준 씨는 김태촌 씨의 직계 선배로 신우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김홍일 의원의 인척과 가까웠던 그는 정현준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유명인사가 됐다.
광주 출신인 박영장 씨는 계보상 박종석 씨 후배로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사건 주역이다. 박씨는 당시 신민당 비주류 측 요청을 받고 김태촌 씨를 끌어들여 김영삼 씨가 이끄는 주류 측에 테러를 가했다.
이승완 씨는 전북 주먹계의 대표주자다. 태권도 국가대표 출신인 그는 서울 동대문에서 주류도매상으로 큰돈을 벌었다. 조양은 씨와 김태촌 씨가 ‘3년 전쟁’을 벌일 때 화해를 중재하기도 했다.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 주역으로 안기부의 지원을 받아 우익 성향의 호국청년연합회(호청련)를 결성했다. 국기원 이사와 태권도신문 회장을 지내는 등 태권도계 실력자였던 그는 대한태권도협회장 선거 비리에 연루돼 구속되기도 했다. 2008년 홍준표 의원이 대한태권도협회장으로 취임한 후 협회 고문으로 복귀해 눈길을 끌었다.
부산 3세대 주먹의 간판은 칠성파 이강환 씨. 영화 ‘친구’로 널리 알려진 칠성파는 단일 조직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탄탄하다는 평을 듣는 부산주먹계 최강자였다. 1970년대 초반 칠성파 두목에 등극한 이씨는 1990년대 초 ‘범죄와의 전쟁’ 때 구속돼 장기 수감생활을 한 후 대외적으로 은퇴했으나 여전히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밖에 유지광 후계자인 경기 이천의 김상철 씨, 수원의 이석재 씨, 부산 영도파의 천달남 씨 등 3세대 주먹 중에는 걸출한 인물이 많다. 또한 수사기관에 포착되지 않은 숨은 실력자가 적지 않다. 주먹계 발칵 뒤집은 ‘사보이호텔’ 사건
1975년 1월 발생한 사보이호텔 사건은 4세대 주먹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조양은 씨와 그 동생들이 신상사파를 공격한 이 사건으로 주먹계는 발칵 뒤집혔다. 김태촌 씨는 신상사파와 가까운 호남 출신 선배들의 지시를 받고 조씨에 대한 응징에 나섰다. 이른바 ‘3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3월 조씨 선배인 오종철 씨가 김씨에게 피의 보복을 당했다. 뒤이어 OB파의 이동재 씨가 상경하면서 3대 패밀리 시대가 열렸다.
3대 패밀리가 주먹사에서 갖는 의미는 건달세계의 풍토를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점이다. 일대일 맨주먹 대결이 사라지고 칼과 낫, 도끼 등으로 무장한 채 집단으로 싸우는 게 일상화됐다. 선배 주먹들을 공격하는 하극상 사건도 공공연히 벌어졌다.
3대 패밀리가 전국 최고의 깡패집단으로 인식된 데는 수사기관과 언론의 공이 크다. 사고를 자주 치다 보니 수사기관의 집중 표적이 됐고, 언론 역시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고 이들을 건달세계 대표선수로 포장한 것이다.
사실 3대 패밀리의 전성기인 1970년대 후반~80년대 후반 서울 주먹계에는 안상민(안토니파), ‘용팔이’ 김용남 씨 등 이들 못지않게 뛰어난 주먹이 많았다.
지방은 고유의 토착조직들이 장악했다. 전북 익산의 배차장파, 전주의 월드컵파와 나이트파, 대구의 동성로파와 향촌동파, 대전의 옥태파와 진술파, 경기 안양의 AP파와 타이거파, 인천의 꼴망파, 충북 청주의 시라소니파와 파라다이스파, 경북 영천의 소야파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조직이 난립했다. 3대 패밀리가 세다고 해도 이들의 영역을 침범할 순 없었다. 예컨대 칠성파가 버티는 부산에서는 3대 패밀리가 명함도 못 내밀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렇긴 해도 3대 패밀리가 오랫동안 서울 암흑가를 주름잡았고 그 명성이 전국적으로 통했던 건 분명하다. 이는 세 조직에서 행동대장급이나 핵심 조직원으로 활동했던 주먹들이 뒷날 군소 조직의 보스가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3대 패밀리 가운데 가장 일찍 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이동재 씨의 OB파. 이씨는 1988년 양은이파의 방계조직인 순천시민파의 급습을 받고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재기불능의 중상을 입은 뒤 외국으로 떠났다. 1980년 조양은, 김태촌 씨가 신군부에 의해 구속된 후 한때 서울 암흑가의 황태자로 군림하던 이씨의 몰락은 건달세계의 허망함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흥미로운 것은 3대 패밀리 두목들이 전국구 주먹의 위상을 갖추는 동안 조직은 내리막길을 걸었다는 점이다. 1980년 2월 구속된 조양은 씨는 꼬박 15년형을 살았다. 조씨는 교도소 안에서 황제 대접을 받으며 전국 각지의 주먹들과 친분을 쌓았다. 95년 조씨가 출소했을 때 수사기관에서는 양은이파의 부활을 예상하기도 했으나 현실은 달랐다. 조직은 와해됐고 그를 따르는 몇몇 동생이 있었을 뿐이다. 이런저런 문제로 조씨와 갈등을 겪은 옛 부하들 중 일부는 그를 더는 보스로 대우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추종자가 생겼다. 조씨는 기독교 신앙에 의지해 새로운 삶을 모색했으나 수사기관의 끈질긴 감시와 주변 유혹, 의지 부족 등으로 몇 차례 더 구속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골프장에서 만나 이권 조정
김태촌 씨의 출소 이후 삶도 조씨와 다르지 않았다. 그가 이끌던 범서방파 역시 양은이파와 같은 수순으로 무너져갔다. 1986년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 테러사건, 90년 신우회 결성 사건에 이어 수감 중이던 93년에 일어난 슬롯머신 사건은 그에게 ‘한국 최고의 깡패’라는 ‘영예’를 안겼다. 하지만 2005년 8월 출소했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허명뿐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사업가로 변신해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
스스로 먹고살 궁리를 해야 하는 그에게 교도소 밖 세상은 낯설었다. 어쨌든 왕년의 보스 아닌가. 품위 유지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구두도 양복도 허투루 착용할 순 없는 노릇. 차도 아무거나 탈 수 없었다. 각종 경조사에 다닐 때는 수십 명씩 데리고 다녀야 했다. 이렇듯 건달세계에서 완전히 발을 빼지 못하는 동안 수사기관은 집요하게 그의 죄를 찾아냈다. 수감과 입원을 되풀이하면서 그의 여생은 처절히 망가졌다.
2007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경상대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는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절규했다.
“징역을 너무 오래 살다 보니 고통스럽다. 보스고 건달이고 조직이고 다 지겹다. 솔직히 나나 조양은이나 무슨 두목이냐. 우리는 평생 교도소나 다니는 실패한 인생이다. 진짜 두목들은 뒤에 있다.”
그는 자신이 인정하는 주먹계 보스로 정종원, 신상사, 조일환, 이승완, 박종석, 정학모, 이강환 씨 등을 꼽았다.
‘범죄와의 전쟁’으로 전국의 유력한 조직들이 타격을 입거나 괴멸된 후 주먹계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았다. 예전처럼 큰 주먹도 없고 눈에 띄게 강한 조직도 없다. 다들 고만고만한 수준이다.
주먹건달 시대는 가고 자본건달 시대가 왔다. 예전에는 주먹 하나만으로도 조직을 이끌었지만 지금은 돈 없으면 두목 노릇을 못한다. 건달들은 의리 대신 이권을 좇아 이합집산한다. 조직도 슬림화됐다. 평상시 흩어져 있다 일이 생기면 뭉친다. 웬만해선 조직 간 전쟁도 하지 않는다. 싸울 일이 생기면 두목끼리 골프장에서 만나 이권을 조정한다. ‘사업’ 분야도 다양해졌다. 겉으로는 다들 합법적인 사업가다. 주먹 못 써도 돈 있으면 보스다. 보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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