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17일 종묘공원. 초겨울 마른 땅을 적시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과 종로지역 국회의원, 종로구청장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셋, 둘, 하나, 제로”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오 시장 등이 일제히 버튼을 눌렀다. 폭죽 소리와 함께 현대상가에서 낡은 현판과 구조물들이 떨어져 내렸다. 현대상가는 세운상가를 구성하는 8개 동 중 종묘 쪽에 가장 가까이 있는 건물이다.
‘결국 저렇게 철거되는구나.’
세운상가 아파트의 오랜 주민인 송달석 씨(74)도 한 무리의 사람들 속에서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봤다. 세운상가에 둥지를 튼 지 30여 년. 오래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착잡한 마음을 달래기는 쉽지 않았다.
‘숲길-주상복합 조성’ 서울시 장밋빛 청사진
낡은 세운상가를 없애고 도심 속 숲길을 조성한다는 서울시의 계획은 얼핏 듣기에 나무랄 데가 없었다. 1단계로 종묘공원 맞은편의 현대상가를 철거하기로 했다. 이어 세운·청계·대림 상가를 2012년까지, 삼풍·풍진·신성·진양 상가를 2015년까지 정비하면 세운상가는 녹지축으로 탈바꿈할 터였다. 그 옆으로는 고층 주상복합단지를 조성한다고 했다.
송 씨는 ‘세운녹지축 조성사업’의 밑그림을 그린 서울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사업협의회 멤버였다. 2007년부터 10여 차례 회의에도 참석했다. 세운상가 아파트 주민회장을 여러 차례 맡았기 때문에 자천타천으로 협의회에 낄 수밖에 없었다.
왠지 이상했다. 서울시가 내세운 사업의 당위성, 저명한 교수들의 사업 전망…. 계획은 장밋빛인데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다.
아파트에선 종묘, 창경궁, 창덕궁이 한눈에 들어왔다. 건축을 잘 모르는 그가 봐도 천재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이 아파트는 뭔가 특별했다. 상가의 옥상은 아파트의 마당이었고, 유리 천장에선 햇볕이 건물 중앙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한 명에 불과했다. 사업협의회 멤버들은 대부분 서울시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을 살리는 프로젝트라는데…. 이제 떠날 날이 머지않았구나.’ 스스로를 다잡았다.
현대상가 현판이 땅에 내려온 날, 그는 종로구 청운동 집에서 아내와 소주잔을 기울였다. 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을 그때까지만 해도 세운상가와의 이별이 임박한 줄 알았다.
朴대통령 부부가 테이프 끊은 첫 주상복합
송 씨가 서울 도심 최초의 주상복합인 세운상가 주민이 된 것은 1976년. 완공한 지 9년 뒤였다. 당시 그는 TV를 제조하던 제네랄산업에서 일했다. ‘별표’ 라벨의 천일사와 천호사, 동남샤프 등과 함께 텔레비전 전문 전자회사로 성장하던 기업이었다.
자연스레 그도 세운상가와 친해졌다. 시제품을 만들면 세운상가에 풀어 시장 반응을 확인하던 때였다.
처음엔 전세로 입주했지만 살아 보니 마음에 쏙 들었다. 그는 이듬해 은행 대출을 받아 집주인이 됐다. 집값은 아직도 정확히 기억한다. 600만 원. 통계청이 집계하던 월평균 가구당 소득이 10만 원 남짓이던 때였다. 송 씨에게도 이 돈은 ‘거금’이었지만 세운상가 아파트에 살게 됐다는 게 꽤나 자랑스러웠다.
준공식 때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와서 테이프를 끊었던 곳이다.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의 세운(世運)이란 이름은 김현옥 전 서울시장이 지었다. 이웃 주민들 가운데 신문사 편집국장, 대학교수, 탤런트도 많았다.
가스보일러와 엘리베이터도 세운상가 아파트의 자랑이었다. 일본에서 수입한 고급 보일러라고 했다.
폐쇄회로(CC)TV가 뭔지도 모르던 1980년대 초에 세운상가는 엘리베이터 안내원을 없애고 CCTV를 설치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담배 피우시면 안 돼요” CCTV를 지켜보다 관리실에서 음성 안내를 하면 방문객들이 깜짝 놀라곤 했다.
송 씨도 샐러리맨치곤 넉넉한 편이었다. 집 근처 효제초등학교에서 테니스를 치고 하얀 운동복을 입고 귀가할 때면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을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자녀들도 자연스레 ‘세운상가 키즈’가 되어 갔다. 모든 것을 신기해하던 유치원생, 초등학생이었다. 주한 미군이 본국에서 가져온 수입 라디오부터 무전기까지 없는 것이 없는 세운상가가 집 아래였으니 굳이 놀이터를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전자제품을 놀잇감으로 삼다 보니 공학도의 길을 가는 이웃 학생들이 많았다. 송 씨도 상상했다. ‘우리 아이들도 공대생이 되지 않을까?’
때론 불안했다. 건물 3층 한쪽에 늘어선 도색잡지들. ‘빨간’ 비디오테이프부터 플레이보이 잡지까지 거래되던 그곳엔 언제나 사람들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송 씨는 자녀에게 종종 주의를 줬다. “집에서 1층까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녀라.” 3층에는 가지 말라는 얘기였다. 송 씨에게도 세운상가는 신기했다.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느껴졌다고나 할까.
세운상가는 거대한 공장
TV에서부터 선풍기, 오디오, 냉장고, 소형 카세트 플레이어 등 전자기기를 모두 한 곳에서 살 수 있었다.
고장 난 물건의 수리와 시제품 제작도 가능했다. 제품 제작에 필요한 작업도구와 공구를 파는 가게, 부품과 시제품을 제작하는 공장까지 모두 세운상가 안팎에 있었기 때문. 1층에서 해결이 안 되면 2층의 상인이, 이어 3층의 상인이 나섰다. 세운상가 내 각각의 작은 가게들은 하나의 거대한 공장처럼 분업과 협업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금만 과장을 보태면 ‘미사일이나 탱크도 만들 수 있는 곳’이 세운상가였다.
1980년대 들어 세운상가의 ‘공기’가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세운상가 아파트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그래도 대한민국 전자상가의 메카는 세운상가라는 자부심은 있었다.
1987년 용산 전자상가가 생기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장사 잘한다고 소문났던 세운상가의 상인들이 용산으로 떠나갔다. 용산에서 ‘떼돈’을 벌었다는 뒷이야기도 들렸다.
1998년 서울 광진구 구의동 강변 테크노마트가 들어서면서 또 한 번 상인들은 ‘썰물’처럼 세운상가를 빠져나갔다. 전자제품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변한 것도 변수였다. 사후 서비스가 중요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백화점에서 사야 언제든 교환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세운상가 주민 송 씨도 언제부터인가 백화점에서 전자제품을 구입하고 있었다. 송 씨가 보기엔 세운상가에 마지막으로 ‘찬물’을 부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재개발 그 자체인 것 같다.
문화재청 “초고층 안돼” 제동… 그리고 3년
청계천 개발 때 시작된 세운상가 재개발 논의는 2006년 오세훈 시장의 취임으로 두드러진 진척을 나타냈다. 2006년 10월 재정비 촉진구역으로 지정됐다. 서울시는 2008년 12월 세운상가 녹지축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기공식을 열었다.
2009년 현대상가의 철거가 끝날 때만 해도 금세 상가들이 헐리고 녹색 숲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브레이크’가 걸리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조로웠던 사업에 제동을 건 곳은 문화재청이었다.
2010년 5월 문화재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맞은편에 최고 122m(36층) 건물을 짓는 데 동의할 수 없다며 높이를 75m로 낮추라고 요구했다. 주민들은 황당했다.
“아니, 서울시는 이걸 몰랐던 거야? 도심에 녹지를 돌려줘야 한다고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더니….”
송 씨도 놀랐지만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협의해 해결할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대책은 없고 시간은 계속 흘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동산 불황이 찾아오면서 사업성은 더 흐려졌다. 시에서는 아무 얘기가 없었다. 1년, 2년, 그리고 3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세운상가는 지워져 갔다.
난리가 난 건 상인들이었다. 재개발한다는 얘기에 거래처가 끊겼다. 세운상가가 철거된 줄 아는 시민들도 많았다. 상가에서 사람 구경하기도 힘들 수밖에 없었다. 송씨는 그동안 “세운상가가 아직 남아 있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지 모른다.
주민들은 재개발에 대해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하고 있다. 소문으로는 박원순 시장과 서울시는 세운상가를 그대로 두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26일 주민들은 아무도 초대받지 못한 채 ‘세운지구 재정비 방향에 관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그 자리에서 또 한 번 존치에 힘이 실렸다는 전언이다. 아직까지 정확히 언제 결론이 날지, 주민들의 의견은 어떻게 들을지 송 씨가 아는 바는 없다.
거기 아직도 안 헐렸어요?
“택시기사 양반, 세운상가 좀 가주세요.”
“거기 아직도 안 헐렸어요? 재개발한다고 하지 않았나?”
2013년 1월 세운상가 앞. 철거된 현대 상가 터를 지나니 세운상가의 좁은 골목이 나왔다. 복잡하고 정겹고 누추한 곳에서 상인들이 겨울을 나고 있었다.
히터, 금속 너트, 음향기기 등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상품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송 씨도 자신이 살던 아파트로 매일 출근한다. 1990년대 초 아이들의 학교 때문에 청운동으로 이사를 했지만 이 집을 도저히 남에게 팔 수가 없었다.
과거에는 인테리어 사업을 했던 아내가 사무실로 사용했다. 이제 방 두 칸은 세를 주고 한 칸은 본인이 사용한다.
누군가는 이곳을 ‘슬럼가’라고 말하고 ‘근대화가 남긴 괴물 같은 건물’이라고도 비난한다. 송 씨는 뭐가 맞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안다. 제대로 방향이 정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처럼 존치와 재개발 사이에 붕 떠버린 상태를 지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
올해 겨울에는 유달리 눈도 많이 온다. 눈이 오면 건물 수명에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 헐릴지도 모르는 건물이지만 ‘눈’이 올 것 같으면 송 씨는 옥상에 오른다. 올라가면 푸른 종묘가 한눈에 들어온다. 세운상가의 운명에는 아랑곳없이 종묘는 그 옛날 그대로다. “조만간 건물에 페인트라도 칠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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