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천재화가 이중섭(1916∼1956)이 활동했던 제주 서귀포시에 후배 예술작가들이 모여들면서 새로운 ‘예술 혼’을 불어넣고 있다. 이중섭이 생활하며 ‘서귀포의 환상’, ‘게와 아이들’ 등의 작품을 남긴 서귀포시 자구리해안을 비롯한 송산, 정방, 천지동 일대는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초가가 슬레이트나 시멘트 집으로 바뀌었을 뿐 각종 개발바람에도 비켜서 있었다. 마을미술프로젝트가 문화체육관광부와 서귀포시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3월부터 진행되면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음습하고 후미진 골목길은 산뜻한 벽화로 단장했고 볼품없었던 해안은 예술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 이중섭의 예술 혼, 유토피아로
이 미술프로젝트는 지역에서 끌어낸 독특한 이야기를 예술 작품으로 표현해 대규모 미술마을을 조성하는 사업으로 ‘유토피아로(路)’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불로초를 구하러 서귀포에 온 중국 진시황의 사신 서복의 전설이 살아 있고, 무병장수의 별인 남극노인성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중섭 역시 전쟁의 비참한 현실에서도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유토피아를 꿈꿨다. 이런 얘기가 여러 작품과 전시공연 프로그램에 녹아 있다.
유토피아로는 이중섭미술관을 출발해 서귀포 예술시장∼칠십리시공원∼천지연로∼자구리해안∼소암기념관을 거치는 4.4km의 길이다. 서귀포시가 작가 산책길로 조성했지만 그동안 찾는 이가 없었다. 유토피아로로 변신하면서 올레꾼, 관광객 등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29일 오후 서귀포시 자구리해안. 이중섭이 자구리해안에서 그린 ‘게와 아이들’을 스케치하는 모습을 정미진 작가가 가로 7m, 세로 3m 크기의 브론즈로 실감 나게 재현했다. 서울에서 온 김인봉 씨(53)는 “서귀포 거리가 새록새록 변하는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다”라며 “이중섭을 직접 만나는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제주서예문인회 소속 회원들은 인도 50m에 보도블록 대신 서귀포 출신 서예가인 소암 현중화 선생의 작품을 음각으로 새겨 넣은 현무암 석판을 깔았다. 손으로 만지거나 맨발로 걸으면서 촉감으로 작품을 느낄 수 있다.
1960, 70년대에 신혼여행을 왔던 신혼부부들의 추억 속의 사진을 전시하는 ‘행복한 사진관’도 있고 생태환경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한 어린이들이 직접 만든 소품을 모아 작품으로 전시하기도 했다. 이번 마을미술프로젝트에는 1차로 22점의 작품을 지난해 말 설치했으며 2차로 다음 달 말까지 19점이 들어선다. 25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 한국의 예술섬으로
미술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지역주민들은 마을 분위기를 망칠 것을 걱정하며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설득 끝에 작업이 시작된 이후 우중충한 벽이 화사한 예술작품으로 변하면서 주민들의 눈총도 누그러졌다. 작품이 들어서면 “바다에 빠져 죽어버리겠다”고 위협하던 한 주민은 아침마다 걸레를 들고 조각 작품의 먼지를 닦아낼 정도로 마음이 변했다. 칠십리횟집거리 상인연합회 고창범 회장(49)은 “지나가던 관광객, 올레꾼들이 발길을 자연스럽게 멈춰서 자구리해안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보면서 예술 공간이 지역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예산은 14억5000만 원으로 전국 마을미술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총감독을 맡은 김해곤 씨(50)는 “자연생태가 살아 있는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지역 주민, 관광객이 함께 호흡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라며 “섬 자체가 하나의 미술관인 일본의 나오시마처럼 제주를 한국의 예술 섬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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