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세련되게 차려입은 젊은이들과 중국인 등 외국인 관광객이 넘쳐나는 서울 영등포구의 복합쇼핑몰 ‘경방 타임스퀘어’. 이곳은 2003년까지만 해도 산업화의 초석을 쌓았던 경방의 공장 터였다.
문을 닫기 직전 이 공장의 고용인원은 100명 남짓. 하지만 2009년 대형마트, 영화관, 의류매장, 식당 등이 입주한 타임스퀘어가 들어서면서 이곳은 서울 서남부권의 ‘랜드마크’로 변신했다. 현재 상시 근로자만 1만5000명이다. 영등포 일대 주변 시설의 고용창출 효과까지 더하면 타임스퀘어가 만든 일자리는 3만5000개에 이른다. 공장 터에 복합쇼핑몰이 들어서자 일자리 수가 350배로 늘어난 것이다.
비슷한 면적(38만 m²)의 대구 검단지방산업단지와 비교해도 타임스퀘어의 고용창출 효과는 두드러진다. 자동차부품, 섬유제조공장 등 320여 곳이 입주한 검단지방산업단지의 고용인원은 지난해 말 3700명으로 타임스퀘어의 4분의 1 수준이다. 검단지방산업단지의 근로자 수는 글로벌 경기침체 등의 영향 등으로 3년 전인 2009년 12월에 비해 100명가량 줄었다.
타임스퀘어는 서비스 부문이 얼마나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낼 수 있는 보고(寶庫)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전문가들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청년 일자리난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정책의 뼈대를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 쪽으로 옮기는 ‘패러다임 시프트’(사고 틀의 전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 규제에 막혀 저임금 서비스업 일자리만 양산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본격적인 공업화가 시작된 후 한국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의 주인공은 단연 제조업이었다. 하지만 공장설비가 자동화되고 중국이 글로벌 생산기지로 부상하면서 제조업의 일자리 창출 능력은 서비스업에 추월당했다.
제조업의 일자리 창출 능력을 보여주는 고용탄력성은 1970년대에는 0.59로 서비스업 고용탄력성(0.49)을 앞섰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제조업이 서비스업에 뒤처지기 시작해 2000년대 제조업의 고용탄력성은 0.08로 서비스업(0.72)의 9분의 1로 떨어졌다. 제조업 생산이 1% 늘어날 때 일자리 수는 0.08% 늘지만 서비스업 생산이 1% 늘어나면 일자리는 0.72% 증가한다는 의미다. 산업연구원도 2005∼2009년 서비스업과 관련해 새로 일자리를 찾은 인원은 125만 명으로 제조업(10만 명)의 12.5배라는 분석 결과를 내놨다.
문제는 한국 경제의 서비스 부문 성장이 여전히 ‘부가가치’ 낮은 업종에만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지난해 서비스수지 현황에 따르면 고부가가치 서비스 업종인 법률, 컨설팅 등 사업서비스, 특허권 사용료, 여행 분야는 모두 10년 넘게 만성적자를 이어가고 있다. 오영석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서비스수지가 14년 만에 흑자를 거뒀지만 사업서비스와 특허권 사용료 적자폭은 오히려 커졌다”며 “제조업 중심의 경제구조인 독일, 일본이 고부가가치 서비스업 분야에서 흑자인 것과는 대조적”이라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비스 부문에서 창출되는 일자리도 상당수가 저임금 일자리에 편중돼 있다. 고부가가치 서비스 부문인 의료 법률 관광의 규제 개선이 지연돼 성장이 정체되는 사이 영세자영업자만 늘어난 탓이다. 실제로 국내 서비스업 일자리의 80%가량은 음식·숙박업 등 저임금 일자리에 몰려 있다.
유경준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여 질 높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각종 규제 등으로 서비스업 고부가가치화가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 “경제정책 뿌리부터 바꿔야”
지금까지 새로 들어선 정권들은 모두 ‘서비스업 육성’을 최우선 경제공약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련 공약이 일부 정치권과 이익단체들의 반발로 좌초됐다.
노무현 정부는 1, 2차 서비스업 경쟁력 강화 대책, 이명박 정부는 서비스산업 선진화 방안을 내놓고 투자개방형 의료법인 도입, 국제학교 유치, 전문직 개방 등을 추진했지만 해당 분야의 성장을 가로막는 ‘손톱 밑 가시’나 ‘신발 속 돌멩이’는 여전한 상황이다. 중점 육성할 서비스산업을 선정해 세금을 감면해주고 자금과 인력을 지원해주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18대 국회에 이어 19대 국회에 다시 제출됐지만 아직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서비스업 육성이 이익단체와 정치권의 반대, 부처 간 칸막이에 막혀 지지부진한 사이 서비스업은 정부 지원에서 여전히 소외돼 있는 실정이다. 2011년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 재정지원 금액의 53.8%가 제조업에 돌아간 반면 서비스업에 대한 지원은 10.8%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서비스업 경쟁력을 선진국 수준으로 높여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새 정부가 경제정책의 틀을 뿌리부터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오정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자리 창출의 열쇠는 서비스산업 개혁”이라며 “새 정부는 각종 이익단체의 요구와 정치권의 반대를 넘어서는 과감한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MB정부 ‘고용 서프라이즈’는 외화내빈 ▼
정부가 발표하는 일자리 통계에는 재정을 투입해 만든 ‘민간기업 청년인턴’ 4만∼5만 명이 포함돼 있다. 정부가 지원을 중단하는 순간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일자리들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런 점 때문에 고용문제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수치만 볼 것이 아니라 속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 5년간의 지표를 보면 적어도 ‘고용 부문’만큼은 한국이 경제위기를 매우 성공적으로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 전년 대비 취업자 수 증가폭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정점이던 2008년(14만5000명) 2009년(―7만2000명)에 주춤했을 뿐 2010년 32만3000명으로 급등하더니 2011년과 지난해에는 각각 40만 명을 돌파했다.
내수 침체와 유럽 재정위기 등 안팎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유독 일자리 수는 크게 늘었고, 특히 지난해에는 ‘고용 서프라이즈’(기업 실적이 기대 이상으로 발표됐을 때 증권가에서 쓰는 말)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청와대도 최근 “일자리가 2008년 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한 주요 국가는 한국과 독일뿐”이라며 ‘이명박 정부의 국정 성과’ 첫머리에 고용지표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양(量)은 늘었을지 모르지만 고용의 질은 오히려 떨어졌다.
우선 늘어난 일자리의 대부분은 고령자의 일자리였다. 지난해 말 기준 50, 60대의 일자리는 2007년 대비 126만, 49만 명이 각각 늘었다. 하지만 20대 취업자 수는 같은 기간 38만 명이 줄었고, 30대도 28만 명이 감소했다. 청년층 인구 감소라는 인구학적 요인이 있긴 하지만 청년층이 구직난을 겪으며 대거 비경제활동인구로 빠지는 동안 직장에서 조기 은퇴하고 불안한 노후에 직면한 베이비부머들이 ‘제2의 취업전선’에 뛰어든 탓이다. 50, 60대 취업자 중에는 영세 자영업자 등 ‘생계형’이 많아 일자리의 질이 대체로 낮다. 지난해에는 60세 이상 남성 취업자 수가 사상 처음으로 20대 남성 취업자를 추월하기도 했다.
정규직보다 임시직 일자리가 많이 증가한 것도 특징이다. 5년간 증가한 전체 일자리 125만 개 중 주당 근로시간이 36시간 미만인 ‘시간제 일자리’는 절반 수준인 61만 개나 됐다. 이들 중 상당수는 풀타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임시로 일하고 있거나 더 나은 직장으로 옮겨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불안정한 취업자로 언제든 노동시장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산업별 취업자를 보면 사회복지·보건업이 66만 명, 공공행정 분야가 16만 명 늘었다. 사회복지 부문 취업자는 일반적으로 청년보다 중장년 여성 취업자가 많다. 공공부문 일자리는 안정성은 높지만 국가경제 차원에서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공식 실업자뿐만 아니라 취업준비생, 아르바이트생, 구직단념자 등 ‘사실상 백수’에 해당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하면 그 수가 400만 명에 이른다”며 현재 실업률 지표의 현실성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고용투자팀장은 “현 정부에서는 청년 고용이 부진했고 베이비부머들이 대거 영세자영업이나 파트타임으로 진출하면서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가 많이 늘었다”며 “아무리 위기 국면이라고 해도 한국이 선진국을 지향한다면 고(高)부가가치 산업구조로 가야 하고, 일자리의 질을 높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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