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창피당한 얘기도 기록… 이틀치 일기 번역 1년 걸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12일 03시 00분


승정원일기 한글로 옮기는 고전번역원 신참 안소라씨

젊은 여성 한문학자 안소라 씨가 고전번역원 사무실에서 승정원일기를 번역하는 도중 잠깐 짬을 내 현재 작업하고 있는 부분을 밝은 표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젊은 여성 한문학자 안소라 씨가 고전번역원 사무실에서 승정원일기를 번역하는 도중 잠깐 짬을 내 현재 작업하고 있는 부분을 밝은 표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제가 지난해 내내 번역한 것이 승정원일기 이틀 분량에 불과했어요. 앞으로 90년은 더 작업해야 끝낼 수 있대요.” 최근 서울 종로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만난 안소라 씨(30·여)의 말이다. 안 씨는 승정원일기 외부 번역자 가운데 한 명. 평생이 걸려도 번역을 끝낼 수 없을지 모르는데도 표정은 밝기만 하다. 정부출연기관인 고전번역원은 한문으로 된 우리 고전을 번역하는 일을 주로 한다. 현재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번역 현대화 작업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번역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실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작성한 업무일지다. 》
안 씨는 지난해 승정원일기 번역작업에 합류했다. 50명가량의 번역인력 가운데 가장 젊다. 성균관대에서 한문학과 학부와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6년 동안 별도의 번역 과정을 공부해 15년 넘게 한문과 씨름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자를 배우면서 한문에 눈을 떴다. 친구들은 한자가 ‘꼬불꼬불한 글자’라며 어렵게만 생각했지만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중고교 때는 한문 경시대회에도 나간 ‘한문 영재’로 꼽혔다. 남들이 보기엔 ‘한문 도사’쯤으로 비칠 법하지만 지난해 승정원일기 이틀 분량을 번역하는 데도 자문 담당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을 마칠 수 없을 정도였다.

안 씨는 “번역자들에게는 고문헌 한 줄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큰 영감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을 지난해 영화 ‘광해’를 보면서 깨달았다”며 디지털시대에 고전 번역이 지니는 의미를 설명했다. 지난해 1200만 명 넘는 관객이 본 영화 ‘광해’는 광해군 8년 승정원일기에서 사라진 보름 동안의 기록에 가짜 왕 ‘하선’의 행적이 담겨 있다는 역사적 상상에서 출발한다. 안 씨는 친구들에게 “내가 저 일기를 번역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승정원일기는 왕의 일상은 물론이고 회의 내용과 상소문까지를 모두 손으로 기록해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조선 중기 인조부터 말기 고종 때까지 기록만 남아 있는데도 글자 수가 2억4000여만 자에 이르러 세계 최대 규모의 역사기록물로 꼽힌다.

영조 4년(1728년) 3월 13일 왕이 ‘경연(經筵)’에 참석한 부분에는 영조가 경연 도중 깜빡 졸다가 서경(書經)의 한 대목을 잘못 읽었다는 내용까지 나온다. 서경은 ‘사서삼경’ 중 하나로 영조가 왕자 시절부터 수없이 공부했을 텐데도 실수했다. 영조는 “어제 밤늦게까지 업무를 보느라 잠을 설쳤더니 정신이 맑지 않고 어지러워 이같이 되었다”고 변명했지만 신하들은 “강의 내용 하나하나가 성군의 업적인데 태만한 기운을 키워서는 안 된다”고 매섭게 지적한다.

안 씨는 “역사적인 상황도 반영해 정확하게 옮기려니 힘은 들지만 지루하거나 딱딱한 작업은 아니다”며 “과거를 꼼꼼하게 복원해놓은 번역이 앞으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형태로 다양하게 활용됐으면 하는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승정원일기는 1993년 번역에 착수했지만 전체 4509책 분량 중 420여 책의 번역을 마쳤을 뿐이다. 지금 속도라면 90년 뒤에나 끝난다. 하승현 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45·여) 역시 “한 번의 작업으로 최대한 정확한 번역을 남겨야 하므로 매번 엄격한 평가가 뒤따른다”며 시간에 쫓기기보다는 정확성에 더 비중을 두었다.

승정원일기에는 당시의 정치 경제 외교 인사 등에 대한 내용이 모두 실려 있고 의학 음식 복색 의식 자연현상 등도 상세히 기록돼 한국만의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 중요한 원천이 될 수 있다. 번역작업을 총괄하는 김낙철 고전번역원 역사문헌번역1실장(51)은 “고전 번역은 산에 묻힌 보물의 원석을 캐내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승정원일기#한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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