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충남]충무공 ‘백의종군로’ 제구실 못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21일 03시 00분


경남 등 지자체 따로 복원
홍보부족 활용도 떨어져 고증 거쳐 체계적 개발 필요

지난해 10월 ‘대학생 백의종군로 대장정’에 참가한 대학생들이 경남 산청∼하동 구간의 백의종군로인 덕천강 다리를 지나고 있다. 이순신연구소 제공
지난해 10월 ‘대학생 백의종군로 대장정’에 참가한 대학생들이 경남 산청∼하동 구간의 백의종군로인 덕천강 다리를 지나고 있다. 이순신연구소 제공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충무공의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 복원에 나서고 있지만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데다 홍보도 부족해 활용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무공이 어린 시절 자라고 백의종군 중 가족사에 대한 사연을 간직한 충남 아산 지역에는 백의종군로 복원 계획조차 없어 아쉬움을 낳고 있다.
○ “백의종군로 복원해 충무공 정신 살리자”

백의종군로는 이순신 장군이 1597년(정유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돼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처분을 받은 뒤 한성의 의금부 옥문을 나와 경남 진주까지 걸었던 길을 말한다. 그는 1597년 4월 1일부터 두 달여간 서울∼경기∼충청∼전북∼전남∼경남 진주의 530km 구간을 걸었다. 이순신은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오른다.

이순신 정신을 함양하려는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백의종군로 복원에 나서고 있다. 경남도가 2010년 하동∼진주 161km를, 전남도가 지난해 구례∼순천 119km를 복원했다. 경기도는 백의종군로는 아니지만 이 길과 궤적을 같이하는 수원∼오산 35km의 ‘삼남길’(조선시대 10대 대로)을 개발했다.

지자체들은 각종 기록을 토대로 충무공이 백의종군 중 밥을 먹고 잠을 잤던 곳을 중심으로 백의종군로를 복원했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전남 구례와 경남 산청 등지에서의 행적은 뚜렷하다.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이순신 장군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의 대명사가 된 것은 역경을 딛고 일어난 그의 인생역정 때문이다. 임원빈 이순신연구소장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가 기회가 다시 주어졌을 때 오뚝이처럼 일어나 나라와 백성을 구한 충무공의 멸사봉공(滅私奉公)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 때문”이라고 말했다.
○ 전체를 잇는 ‘하나의 백의종군로’ 필요

그러나 백의종군로는 전국의 구간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경남과 전남, 경기 등의 지자체들이 통일성 없이 산발적으로 개발했기 때문이다. 고증을 거쳐 제대로 복원했는지도 의문이다. 이순신연구소는 20일 ‘백의종군로 복원을 위한 전문가 워크숍’을 열어 백의종군로를 전국적으로 연결해 교육 목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 연구소 관계자는 “일부 지자체들이 백의종군로를 복원했지만 정부 차원의 통일성 있는 개발이 아니기 때문에 중간에 복원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는 경기 평택에서 넘어와 아산과 공주로 이어지는 충남 지역의 백의종군로를 개발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해군사관학교 충무공리더십센터에 따르면 충무공은 백의종군을 하러 가던 중 아산에서 13일을 머물렀고 어머니 변씨와 사별하기도 했다. 당시 83세의 노령으로 죽음을 앞둔 변씨가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보겠다고 전남 여수에서 배를 타고 아들을 찾아 나섰다가 피로와 멀미로 태안의 안흥항 부근에서 숨져 아산으로 운구됐다는 것.

이 센터의 제장명 교수는 “충무공이 고난의 시절에 어머니를 여의어 큰 슬픔에 빠졌던 곳인 만큼 백의종군의 역사를 되새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백의종군로#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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