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세계문화유산 종묘-창덕궁 주변 슬럼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21일 03시 00분


■ 문화재보호구역 묶여 51년간 증개축 규제

보존과 방치 사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서울 종로구 종묘의 담장 밖 골목길에는 허름한 주택과 상점들이 뒤엉켜 있어 도심의 슬럼가를 연상케 한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보존과 방치 사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서울 종로구 종묘의 담장 밖 골목길에는 허름한 주택과 상점들이 뒤엉켜 있어 도심의 슬럼가를 연상케 한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20일 서울 종로구의 종묘 서측 담장 밖 서순라길 주변은 도심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곳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낡은 건물이 많았다. 종묘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하지만 담장 밖에서 불과 1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비닐로 지붕을 씌운 주택이나 갈라진 벽과 담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한 건물의 외벽에는 구청의 재난위험시설 안내 표지판이 붙어 있기도 했다. 액화석유가스(LPG) 통들이 담 주변에 방치돼 있어 화재 위험도 있어 보였다. 종로구 원서동 창덕궁 서측 담장 근처에는 오래된 주택들이 담장에 맞대고 있어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 창덕궁 주변 지역이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이후 50여 년간 문화재보존구역으로 묶여 개발되지 못하면서 도심 슬럼가로 전락하고 있다. 이 지역에 들어왔다가 쓰레기 냄새와 허름한 건물들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고 돌아서는 관광객들도 있을 정도다.

창덕궁과 종묘를 잇는 서순라길에서 만난 일본인 관광객 유카코 씨(23·여)는 “한국에 올 때마다 궁궐을 찾는데 아름다운 궁에 비해 주변 거리는 너무 지저분해 놀랐다”며 “골목길을 지날 때면 음식물쓰레기 냄새 때문에 불쾌했다”고 말했다. 제주도에서 가족과 함께 여행을 온 여성호 씨(50)도 “쓰레기봉투가 여기저기 놓여 있는 모습을 외국인 관광객들도 볼 텐데 부끄럽다”고 말했다.

종묘와 창덕궁은 담장에서 밖으로 10m까지가 국가에서 지정한 문화재보호구역이다. 문화재보호구역 안에서 건설공사를 하려면 구청에 현상변경허가신청을 하고 문화재청의 검토 및 중앙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치는 까다로운 과정을 밟아야 한다. 문화재보호구역으로부터 최대 100m 내 지역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이 지역에선 건물의 높이를 최고 5∼17m(1∼5층) 이하로 제한해 사실상 건물의 증·개축이 힘들다. 건물을 높이 올릴 수 없어 수익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로마 사람들은 조상 덕에 먹고사는데 우리는 문화재 때문에 굶어죽는다”고 하소연했다. 주민 유길상 씨(66)는 “청와대 앞이고 서울 한복판인데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상태로 방치되는 게 말이 되느냐”며 “고도제한 때문에 건물을 올리더라도 수익이 나지 않으니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변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는 “종묘와 창덕궁 주변은 도심이기 때문에 평당 3000만∼3500만 원 정도 된다”며 “하지만 각종 규제 때문에 거래가 이뤄지지 않는다. 바로 앞의 인사동이나 종로 일대는 평당 2억 원이 넘는다”고 설명했다.

종로뿐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인 경기 수원화성 내 주택들이나 경북 경주 역사유적지구, 안동 하회마을 등도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다.

종로구와 수원시 등 해당 지역 지자체와 국회의원들도 도시 미관을 해치는 세계문화유산 주변의 정비가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해 새누리당 남경필 의원 등 18명의 국회의원이 세계유산 보존·관리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주변의 노후 불량지역을 특별정비구역으로 지정해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정비하자는 것이 골자다. 앞서 18대 국회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특별법을 발의했지만 회기 종료로 자동 폐기됐다.

문화재를 관리하는 문화재청은 문화유산 주변 정비의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예산이 부족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문화재 주변 정비의 주체는 해당 지역 지자체”라며 “토지 매입 등에 상당한 예산이 필요한 만큼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박진우 기자 pjw@donga.com  
이정규 인턴기자 동국대 사회학과 졸업  
#종묘#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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