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일(현지 시간) 미국 뉴저지 주 버겐 카운티 법원에선 미국 내 3번째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가 제막된다. 카운티 정부가 세우는 것이지만 한인 시민단체인 시민참여센터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제막식을 앞둔 김동석 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56)에겐 한 가지 원칙이 있다.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이해관계를 떠나 미국인이 인권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오래간다.
#2. 뉴욕 주 나소 카운티의 한미공공정책위원회 이철우 회장(59)은 최근 전화기에 매달려 살고 있다. 뉴욕 주 하원의원을 상대로 쉬지 않고 전화를 돌리고 있다. 1월 29일 뉴욕 주 상원이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한 이후 하원에 계류 중인 결의안을 서둘러 통과시키기 위해서다.
LA폭동이 바꾼 인생
뉴욕 뉴저지 주를 기반으로 경쟁이라도 하듯 재미교포와 한국을 위해 뛰고 있는 두 사람. 강원 춘천의 고향 선후배다. 걸어온 길은 판이했다. 김 이사의 고향 선배이지만 이 회장은 이 분야에선 한참 후배.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미국 정치에 내재한 ‘정글의 법칙’을 하나씩 체득한 뒤에야 비로소 서광을 보기 시작했다.
1985년 유학길에 오른 김동석 이사는 뉴욕시립대(CUNY) 헌터칼리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마지막 학기를 보내던 1992년 4월. 곧 펼쳐질 귀국 이후의 삶에 대한 기대가 충만했다. 하지만 TV 화면으로 접한 사건이 고민에 빠뜨렸다.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사건이었다.
“가해자의 목소리는 있는데 피해자의 목소리는 전혀 없는 사건이었다. 피해자였던 한인 사회의 목소리가 미 정치권에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성균관대 재학 시절 학생운동 언저리에 있던 그의 피가 다시 끓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에서 한인 정치력 신장에 다걸기(올인)하기로 했다. 1996년에 세운 한인유권자센터(현 시민참여센터). 밑바닥에서 발로 뛰며 미 정치권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한인 커뮤니티의 정치적 존재감을 높인 출발점이었다.
김 이사가 기본부터 찬찬히 밟았다면 이철우 회장은 뜻하지 않게 시민운동에 발을 디딘 사례. 공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뉴욕시립대 브루클린 칼리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컴퓨터 업체를 창업한 뒤 평온하게 살아왔다.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2006년 1월 1일. 톰 수오지 나소 카운티장의 연임 취임식에 초대받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찾아갔다. 뉴욕 주 롱아일랜드 한인회 이사장 자격을 내밀었다. 경제력이 커진 한인의 민원을 해결하려는 취지에서였지만 그렇게 첫걸음은 ‘막무가내’ 형식이었다. 이를 계기로 풍족한 기업인으로 살아왔던 그의 인생행로가 바뀌었다.
오랜 ‘풀뿌리 운동’의 힘
한인 사회의 목소리를 내려면 미 정치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무기’를 확보해야 한다. 바로 ‘투표권’이다. 영어로 쓰인 두툼한 유권자 등록 우편과 복잡한 절차. 그 시절엔 누구도 유권자로 등록하려 하지 않았다. 김 이사는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발품을 팔아 한인교회를 찾아다녔다. 싫다는 한인들을 떠밀어 등록시켰다. 2002년 뉴욕 퀸스를 시작으로 뉴저지 주까지 한국어 투표 서비스를 관철시킨 것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덕분에 1996년 17∼18%에 머물던 뉴욕 뉴저지 한인 유권자의 평균 투표율은 10년여 만인 2008년 58%까지 상승했다. 김 이사는 “한인의 목소리가 표로 나타나자 미 정치인도 전화하면 받고 만나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수오지 카운티장을 만난 지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2006년 뉴욕 주 주지사 선거에서 이 회장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접촉해 왔다. 당시 유력 후보 엘리엇 스피처를 꺾기 위해 한인 등 소수 인종의 표가 필요했던 것.
아예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사관학교 시절에 배운 ‘전쟁 전략론’을 설파하며 캠프 내 소수 인종 선거대책위원장을 거머쥐었다. 수오지 카운티장은 선거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이 회장까지 패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캠프에서 만난 내로라하는 공화 민주 양당의 선거 전문가들과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캠프에서의 경험을 한인 사회의 권리 신장에 활용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세운 것이 한미공공정책위원회.
그는 딕 체니 당시 부통령이 이라크 파병국 감사 사절로 아시아를 방문하면서 제3의 파병국인 한국을 제외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당장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국토안보위원회 간사였던 뉴욕 주 피터 킹 연방 하원의원(공화당)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한미 동맹을 확인하고 한국의 이라크 파병에 감사하는 결의안을 제출해 달라.” 2006년과 2007년 ‘한미동맹결의안’과 ‘한미방위협력강화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됐다.
한인의 적극적인 참여에 집중한 김 이사. 네트워크를 활용한 정치인과의 타협이라는 고공 플레이에 능한 이 회장. 다른 듯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자금 문제는 두 사람 모두에게 어려운 문제. 미 정치권의 작동 방식을 깨달았지만 ‘실탄’이 부족했다. 미국 내 유대인 기업인과 이스라엘 국민이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에 전달하는 기부금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유니클로 등 일본 기업들도 재미 일본 시민단체에 기부하는 데 열심이다. 그러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눈길을 주지 않고 있다.
지난달 25일 TV로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을 보던 김 이사는 2007년 2월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박 대통령이 워싱턴 의회를 찾았던 때를 떠올렸다. 하버드대 연설 등을 위해 보스턴을 방문했던 박 대통령은 15일 미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열린 위안부 청문회 참석차 워싱턴으로 급하게 차를 돌렸다. 김 이사는 “그때 만난 박 대통령의 청문회 참관을 말렸다. 한일 간 대결 구도로 미 의원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말했다. 당초 그해 6월에 미국을 방문하려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일정을 앞당겨 방문하겠다고 할 정도로 민감한 시기. 한국 유력 정치 인사의 청문회 참석은 다른 신호로 작용할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난 뒤에 들었어요. 몰래 먼발치에서 보고 갔다고 하더군요.”
유대인들이 가르쳐준 2가지
2007년 7월 30일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된 것은 김 이사가 주도한 풀뿌리 운동의 힘이었다. 그는 1999년 캘리포니아 주 하원에서 미국 최초로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킨 마이클 혼다 하원의원을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2006년 10월 중순 무작정 그의 지역구로 찾아갔다. 새너제이에 머물던 그는 ‘유권자’ 재미교포의 서명이 담긴 서한과 카드를 보냈다.
2007년 1월 혼다 의원을 찾아 결의안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같은 달 30일. 혼다 의원은 결의안을 하원에 상정했다. 혼다 의원과 가까웠던 의원 7명과 함께 올린 ‘결의안 No. 121’이었다.
별다른 진척이 없을 때 미국 내 가장 강력한 커뮤니티의 하나인 AIPAC의 지인들이 도움을 줬다. 나치 홀로코스트의 아픔을 널리 알리는 선봉장 역할을 해온 이 단체는 일본으로부터 비슷한 경험을 한 한국, 특히 재미교포의 심정을 이해했다.
“유대인 친구들이 두 가지를 조언했어요. 직접 의원들을 찾아가 그들이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 둘째는 꾸준히 인맥을 쌓아놓아야 중요할 때 정치인들이 움직인다는 냉혹한 현실이었죠.”
그해 봄, 김 이사는 뉴욕 뉴저지 주 재미교포 할머니들을 대형 버스에 태워 워싱턴으로 오갔다. 4∼6월 석 달간 무려 12번을 오갔다. 비용 12만 달러(약 1억3000만 원)는 교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줬다.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기억하는 할머니들은 흔쾌히 버스로 5시간이 걸리는 워싱턴행에 동참했다. 할머니들은 ‘한국의 위안부를 기억하라(Remember Comfort Women)’라는 문구가 쓰인 옷을 입고 의원실을 찾아다녔다. 의원과 보좌관들은 할머니들이 건네는 전단을 거절할 수 없었다.
김 이사는 4년 뒤 뉴저지 주 팰리세이즈파크 시에 미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 최초로 위안부 기림비를 세웠다. 그는 재미교포가 아니라 팰리세이즈파크 시의회의 결의로 세운 ‘미국의 결정’임을 강조했다.
이 회장도 뒤늦었지만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난해 6월 나소 카운티 현충원에 두 번째 기림비를 세운 데 이어 올 1월 초 뉴욕 주 상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힘은 네트워크였다. 선거운동 기간에 만났던 토니 애벌라 뉴욕 주 상원의원을 통해 상정 2주 만에 통과시켰다.
김 이사도 미 정치권에 적극적으로 한인 커뮤니티의 존재를 알리기에 나섰다. 2007년 위안부 결의안이 정체됐을 때 당시 미 하원 외교위원장이면서 유일하게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톰 랜토스 하원의원(2008년 작고)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당시 랜트스 의원이 라스베이거스를 가는 길에 2시간가량 로스앤젤레스에 머문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 이사는 그날 뉴저지 주와 현지 교민들의 십시일반 도움을 받아 로스앤젤레스 JJ그랜드호텔에서 급하게 후원회 행사를 열었다.
“한국 커뮤니티는 왜 가만히 있나”
“미국총기협회(NRA)처럼 기업을 대변하는 로비스트의 정치자금과 비영리 시민단체의 정치자금은 명백히 구분된다. 시민단체가 십시일반 모은 돈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명분이 있고 매칭펀드로 추가 정치자금을 모을 수 있는 길이 많다.”
김 이사는 “미국에 사는 유대인의 영향력이 높기 때문에 결국 미국은 이스라엘을 챙긴다. 이곳에서 한인 커뮤니티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인다면 한미관계도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김 이사를 만날 때 그의 스마트폰에는 쉬지 않고 e메일이 들어왔다. 그동안 만났던 의원들이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 취임 축하 서한을 보냈다’는 메시지였다. 그렇게 수시로 접촉하는 의원만 15명.
지난해 11월 의회 선거 직전 지역구(뉴저지 주) 연방 민주당 상원의원인 로버트 메넨데즈 선거 캠프에는 많은 인사들이 찾았다. 당시 캠프
주변에서는 “메넨데즈 후보가 당선되면 상원 외교위원장으로 취임할 것 같다. 각 커뮤니티가 보자는데 왜 한국 커뮤니티는 가만히 있나”는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아차했던 김 이사는 곧바로 뉴저지 주 잉글우드클리프스의 한 자택에서 후원 행사를 열었다. 이후 메넨데즈 의원의 한국 커뮤니티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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