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3년 됐으니 괜찮겠다는 말에 또 웁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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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3주기, 유족-생존장병들은 지금…

경기 평택 2함대사령부에 전시된 두 동강 난 천안함. 2010년 3월 26일 폭침 당시의 참혹한 흔적이다. 평택=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경기 평택 2함대사령부에 전시된 두 동강 난 천안함. 2010년 3월 26일 폭침 당시의 참혹한 흔적이다. 평택=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전환수 씨(24)는 문을 닫는 소리만 들려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큰 소리를 들으면 불쑥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나기도 한다. 전형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다.

이은수 씨(23)는 어둠에 예민해졌다. 갑자기 불이 꺼지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식은땀이 난다. 그는 어느 날 함선의 식당에서 동료들이 새까맣게 변한 채 시신이 돼 있는 꿈을 꿨다. ‘3년이면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이들이 3년 전 겪었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다.

입대 동기인 전 씨와 이 씨는 천안함 사건의 생존 장병이다. 둘은 그날 해군 입대 후 처음으로 출동했다. 승선한 대원 104명 중 막내였던 전 씨(당시 이병)는 욕실에서 빨래를, 이 씨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전 씨의 몸이 욕실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전기가 끊겨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어렴풋한 비상구 불빛을 따라 배 위로 기어올라가 보니 방금 전까지 경계근무를 섰던 배의 반쪽이 보이지 않았다. 전 씨가 서 있는 나머지 반쪽도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함께 나온 이 씨는 옷조차 제대로 입지 못한 상태였다. 곳곳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다행히 구조된 58명에 들었지만 나머지 46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둘은 2011년 12월 만기제대 했다. 천안함 생존 장병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제대한 사병이었다. 제대한 뒤 대학생으로 돌아왔다. 전 씨는 부경대 해양산업경영학과에 복학해 캐나다 어학연수를 계획 중이다. 이 씨는 대전대 병원경영학과 3학년생이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속에는 3년 전 그날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전 씨는 오른 검지 첫마디가 굽혀지지 않는다. 천안함 사건 당시 몸이 튕겨나갈 때 문틀을 잡다가 인대가 끊어진 것이다. “밥 먹을 때나 글을 쓸 때 불편하죠. 이제는 엄지와 중지만으로 볼펜을 잡고 글씨를 쓸 수 있어요.”

전 씨는 손가락 부상으로 7급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씨는 별다른 외상이 없다는 이유로 유공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천안함 생존 장병 대부분이 이 씨와 비슷한 처지다. 이 씨는 “유공자라는 이름대로라면 공(功)을 따져야 하는데 몸의 부상만 본다. 천안함 사건 이후 국가로부터 받은 건 명절 때 청와대에서 보낸 선물세트가 전부였다”고 말했다.

생존 장병들은 사건이 일어난 3월 26일과 현충일, 국군의 날이 되면 국립대전현충원이나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한다. 경조사가 있을 때도 서로 돕는다. 지난해 생존 장병 중 한 사람인 전준영 씨(26·당시 병장)가 결혼했을 때도 다같이 모여 축하해줬다.

하지만 산 사람끼리 아무리 뭉쳐도 하늘에 있는 전우의 빈자리를 채울 순 없다. 이 씨는 허전함이 들 때마다 고 장철희 일병의 어머니께 안부전화를 한다. “연락할 때마다 죄송한 마음인데 어머니는 ‘네가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는 걸 철희도 원할 것’이라고 격려해주셨다”고 말했다.

천안함 사건이 이들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이 씨가 덤덤하게 말했다.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3년 상을 지내잖아요. 3주기 때도 전우들이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더 열심히 살아야죠.”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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