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하면 뭐가 떠오르나요? 정열적인 축구의 나라? 맛있는 피자와 파스타의 나라? 멋지고 화려한 패션의 나라? 이런 키워드가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말하는 단어인 건 맞아요.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나라, 즉 성악의 본고장으로도 유명합니다.
동아일보에 ‘베르디의 변신인가 푸치니의 목숨인가’라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2월 28일자 A24면). 주세페 베르디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기념공연이 열린다는 내용입니다.
베르디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로 알려졌습니다. TV 광고, 영화, 휴대전화 컬러링으로 한 번씩 들어봤음직한 곡 중에 상당수가 그의 작품이랍니다. 오페라 아리아라면 특히 그렇습니다.
○ 노력과 집념의 음악가
클래식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라면 여러분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생각할 겁니다. 클래식 음악에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있다면 오페라에는 베르디와 푸치니가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베르디는 이탈리아 북부의 파르마에서 태어났습니다. 1813년입니다. 파르마는 작은 도시이지만 조아치노 로시니,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같은 전설적인 음악가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베르디의 아버지는 행상인을 상대로 조그마한 여인숙 겸 잡화상을 운영했습니다.
다른 천재 작곡가와 달리 베르디는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어려서부터 음악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18세 때는 오페라 작곡가의 꿈을 이루려고 파르마를 떠납니다. 명문 음악학교인 밀라노 국립음악원의 입학시험을 치렀지만 떨어졌습니다. 입학 자격 연령보다 네 살이나 많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디는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밀라노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개인교습을 받으며 작곡을 본격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신은 노력하는 자를 배반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밀라노 악우협회가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공연하는 날, 베르디는 대리 지휘자가 됩니다.
공연이 성공하자 악우협회가 오페라 작곡을 의뢰합니다. 최초의 오페라 ‘오베르토(Oberto)’를 작곡하려다가 1834년에 취직 문제로 일단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2년 뒤에는 음악 활동의 큰 후원자이던 안토니오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합니다.
밀라노에 대한 끝없는 동경. 결국 베르디는 1839년 아내와 자녀를 데리고 밀라노로 갑니다. 그해에 ‘오베르토’가 당시 최고의 오페라극장이던 밀라노 라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됩니다.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공식 데뷔인 셈입니다. 그의 나이 26세였습니다. 다른 유명 작곡가보다 늦은 편이었죠.
○ 불행을 이겨낸 거장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요.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자녀와 아내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납니다. 베르디는 음악을 손에서 놓을 정도로 실의와 고통, 비탄에 빠집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도움과 따뜻한 조언으로 위기를 극복하면서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나부코(Nabucco)’를 통해 화려하게 재기합니다. 이후 1842∼1850년에 수십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고 발표할 만큼 왕성한 창작욕을 보입니다. 발표하는 작품은 언제나 호평을 받습니다.
베르디가 37세이던 1850년, 40일 동안 만들었다는 일화로 유명한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가 이듬해 3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초연됩니다. 오페라 역사에 남을 엄청난 히트를 기록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리아 ‘여자의 마음(La donna `e mobile)’은 오늘날까지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파바로티, 도밍고, 알라냐 같은 당대 최고의 남성 테너가 즐겨 불렀지요.
자신감이 생긴 베르디는 이후 더더욱 작곡에 매진해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1853) △춘희(La traviata·1853)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1862) △돈 카를로스(Don Carlos·1867) △아이다(Aida·1871) △오텔로(Otello·1887) 같은 주옥같은 대표작을 쏟아냅니다. 특히 ‘춘희’나 ‘아이다’는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오페라 또는 사랑받는 오페라 순위에서 최정상위권에 오르는 명작입니다. 그는 1859년 재혼합니다.
○ 아름다운 기부에 앞장
베르디는 엄청난 애국자로도 유명합니다. 이탈리아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억압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독립의 열망이 강했던 시기였습니다. 베르디는 애국, 정의, 민족, 국가 같은 주제를 자신의 작품에 자주 녹였습니다. 예를 들어 △나부코(1842년) △에르나니(Ernani·1844년) △맥베스(Macbeth·1847년)가 유명합니다.
특히 ‘나부코’에 나오는 아리아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연주될 때에는 이탈리아 관객이 오스트리아 압제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아름답고 잊혀진 나의 조국’이라는 가사를 ‘아름답고 잊혀진 나의 이탈리아’로 바꿔 불렀습니다.
매일 저녁 시내의 지식인 모임에서는 술잔을 들고 이 아리아를 부르며 조국 독립에 대한 의지를 드높였다고 합니다. ‘비바(만세), 베르디!’라는 말이 나온 이유를 이제 알겠죠?
뜨거운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베르디는 문화예술을 통해 이탈리아 독립정신을 널리 알린 공로로 1861년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의회에서 상원의원으로 추대됩니다. 이후 1865년까지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서 정치 활동을 왕성하게 펼칩니다.
베르디는 1901년 1월 27일 밀라노의 호텔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87세의 생을 마칩니다. 불멸의 거장을 애도하기 위해 장례식에 군중 20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는 사후 유언을 통해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기부합니다. 가난한 음악가를 위한 집을 지어서 작곡 활동에 몰두하도록 도와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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