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 노인이 됐다. 지팡이를 짚고 도로에 나섰다. 차들이 쌩쌩 다니는 도로가 오늘처럼 무섭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한발 한발 내딛기가 불안했다.
○ 몸은 뻣뻣, 앞은 캄캄
5일 서울 마포구 서강로 마포노인종합복지관을 찾았다. 올해 27세인 기자는 이곳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노인 보행자가 겪는 어려움을 체험해 보기로 했다. 국내 한 업체가 ‘평소 건강관리를 거의 하지 않아 건강상태가 나빠진 80세 노인’의 몸 상태를 구현해 만들었다는 노인체험 장비를 착용했다.
복지관 앞 도로는 ‘실버존(노인보호구역)’이다. 실버존은 복지관처럼 노인 이동이 잦은 곳의 반경 300m 내에서 차량 제한속도를 30km(골목길 등 이면도로)나 60km(간선도로)로 정한 곳이다. 2012년 현재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11%에 달하고 교통사고 사망자 가운데 65세 이상 노인 비율도 해마다 늘자 도입한 제도다. 2007년 65세 이상 보행자 교통사고 발생건수는 7426건이었지만 2011년에는 8888건으로 늘었다.
궁금했다. 길바닥에는 큼지막하게 노인보호구역이라 써 있고 표지판도 군데군데 설치돼 있긴 한데, 실제 이곳을 다니는 노인들이 느끼는 도로 환경은 어떨까.
양 무릎과 팔꿈치에 관절을 쉽게 구부릴 수 없게 하는 지지대를 찼다. 몸이 꽤 뻣뻣해졌다. 양 손목과 발목에는 각각 1kg짜리 모래추도 달았다. 도합 4kg의 추를 몸에 매달고 나니 떨어뜨린 휴대전화 하나 집기도 쉽지 않았다. 핵심은 허리 지지대였다. 쇠막대로 고정된 허리 지지대를 착용하니 몸이 자연스레 45도가량 앞으로 숙여졌다. 손에 흰 장갑을 낀 뒤 그 위에 하늘색 고정 장치를 덧대자 손가락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졌다. 몸이 수십 배는 둔해진 듯했다.
눈과 귀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에는 고글처럼 생긴 안경을 썼다. 안경 속은 온통 검은색인데 정면을 볼 수 있을 만큼만 작게 뚫려 있었다. 시야각이 확 줄었다. 그나마 뚫린 정면도 뿌연 필름이 덧대어져 있었다. 실제 70세 이상 노인 열에 일곱이 앞이 뿌옇게 보이는 백내장을 앓고 있고, 시야각도 20대보다 30도 정도 감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에는 말랑한 스펀지를 구겨 넣었다. 밖에서 들리던 소음이 확 줄어들었다. ‘아, 이런 느낌이구나….’
○ 과속 차량이 주는 공포
복지관 문을 열고 인도로 나섰다. 차들은 야속하게 쌩쌩 달렸다. 체험 전날과 당일 복지관을 미리 찾아 전자 속도측정계로 달리는 차량들의 속도를 재봤다. 시속 85km의 빠른 속도로 달리는 트럭부터 굉음을 내며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지는 오토바이까지 과속 차량이 즐비했다. 간선도로 실버존 규정 속도인 시속 60km를 지키는 차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길을 건너가 보기로 했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 겨우 횡단보도를 찾았다. 횡단보도까지는 복지관 문 앞에서 스무 걸음 남짓 거리. 몸이 둔해지니 그조차도 멀었다. 불과 10분 전, 횡단보도를 지척에 두고도 무단횡단을 하던 노인들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됐다.
‘휙.’ 신호가 바뀌고 횡단보도로 들어서려는데 코앞에서 승합차가 빠르게 지나갔다. 가슴이 철렁했다. 시야각이 좁게 만들어진 안경 탓에 양 옆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바로 옆까지 차가 달려와도 알 수가 없었다. 소리를 들어도 ‘어느 정도 거리에서 나는 소리인지’ 감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멀리서 빵빵대는 경적 소리도 희미했다.
건너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구부정한 허리로 신호등을 계속 올려다보며 걷기가 힘들었다. 횡단보도 불빛은 희미했다. 오후 4시, 낮인데도 이랬다. 어두운 밤에는 사정이 더 심각할 수밖에 없다. 실제 도로교통공단이 2011년 고령자 50명의 횡단 패턴을 조사한 결과 76%의 노인이 길을 건너기 전 좌우를 전혀 확인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고 10%의 노인은 녹색불이 깜빡일 때 비로소 횡단을 시작했다.
기자의 노인체험 현장에 동행한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장택영 수석연구원은 “노인들은 신체적 제약 때문에 차량이 오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차도로 들어서는 경우가 많은데, 운전자들은 노인이 차도에 있으면 ‘알아서 피하겠지’ 하고 속도를 줄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실버존의 규정 속도를 시속 30∼60km로 규정해둔 것도 운전자들이 최대한 속도를 줄여 사고를 예방하자는 취지다. 도로교통공단 조사 결과 65세 이상 노인은 젊은 연령층보다 보행 중 사고를 당했을 때 숨질 확률이 2.6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과속 단속카메라 ‘0대’
다른 실버존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서울 중구 충무로 묵정노인회 건물과 구로구 구로노인종합복지관 앞의 제한속도 시속 30km인 ‘이면도로 실버존’ 역시 과속 차량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묵정노인회 주변은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는 데다 공장이 많아 지게차와 오토바이들로 붐볐다. 차들이 워낙 빨리 달려 노인체험 복장을 갖춘 지 10분도 안 돼 실험을 접어야 했을 정도다. 인근에서 20년간 슈퍼마켓을 운영한 배모 씨(80)는 “길을 갈 때 차들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와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많다”고 전했다. 구로노인종합복지관 앞에서는 실버존 표지판을 바로 앞에 두고도 엔진 소리를 내며 가속페달을 밟는 차량이 적잖게 눈에 띄었다. 이곳을 지나던 오토바이 운전자 윤모 씨(43)는 “실버존 자체를 잘 몰랐고 솔직히 안 지켜도 제재가 없어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곳에서도 차량 속도를 측정했지만 제한속도인 시속 30km 이하로 달리는 차량은 드물었다.
이는 실버존을 지정해놓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실버존은 서울 49곳을 포함해 전국 566곳에 지정돼 있다. 하지만 취재 결과 실버존 내 과속을 단속하는 무인카메라는 단 한 대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어린이보호구역의 경우 과속하다 경찰에 적발되면 범칙금이나 과태료를 최대 2배가량 가중처벌하고 있지만 실버존은 가중처벌 조항이 없다. 경찰 관계자는 “노인보호구역에 대한 개념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단속에 나서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운전자들이 알아서 지키겠지’ 기대하지 말고,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도록 도로 구조를 개선하고 단속 장비를 대폭 확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장택영 수석연구원은 “고령화사회가 진행될수록 어린이보호구역 못지않게 중요해지는 개념이 노인보호구역”이라며 “외국에선 교통약자 보호구역에 들어설 때 왕복 3차로에서 2차로로 길을 좁히거나 곡선 도로를 만들어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게 한다”고 설명했다.
교통안전공단 임동욱 선임연구원은 “사실상 방치된 실버존에 과속 단속 장비를 확충해 운전자들의 과속 행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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