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상속 재산을 두고 삼성가(家) 형제 사이에서 벌어진 소송전에서 패한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항소심에서 변호인단을 대폭 축소해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심에서 완패한 이맹희 전 회장은 4조 원대였던 소송 가액을 96억 원으로 대폭 낮춰 항소한 뒤 “소송 가액을 높여가겠다”고 했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없는 상태다. 소송에 참여했던 차녀 이숙희 씨와 차남 고 이창희 씨 유족도 발을 뺐다. 재계 일각에서는 상속 재산이 없는 이맹희 전 회장이 수백억 원에 달하는 소송비용을 아들인 CJ 이재현 회장 도움 없이 해결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 의심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 소극적인 항소심 대응
대규모 변호인단이 꾸려졌던 1심에 비해 항소심 변호인 규모는 조촐해졌다. 1심에서 이 맹희 전 회장 측 대리인으로 나섰던 법무법인 화우의 변호인은 총 10여 명이었지만 2심에서는 화우의 차동언 변호사를 비롯해 3명만 참여했다. 이들 3명은 3월 27일 항소심 재판부에 소송위임장을 제출했다. 1심에서 이건희 회장 측을 대리했던 법무법인 세종, 원, 태평양 등은 아직 항소심에서 소송위임장을 제출하지 않은 상태다.
법조계에서는 이맹희 전 회장 측이 1심에 비해 소극적으로 재판에 대응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고법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새로운 변론 취지를 세운 게 아니라면 한 번이라도 더 기일을 열어 항소심 재판부를 설득하는 게 당연한데도 아직 변론준비기일조차 잡지 않아 의아하다”고 말했다.
○ 소송 비용 어떻게 조달했나
1심에서 이맹희 전 회장이 낸 인지대는 127억 원이다. 상급심에서 최종 패소하면 이건희 회장 측 변호사 비용까지 총 300억 원 이상을 부담해야 한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이 맹희 전 회장 측이 소송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항소를 포기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이맹희 전 회장 측의 주장이 모두 기각된 완패였기 때문에 그런 관측에 힘이 더 실렸다.
하지만 이맹희 전 회장은 소송 가액을 낮춰 항소했다. 항소심 인지대는 4600여만 원이지만 양측 변호사 비용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추가 부담이다.
문제는 이맹희 전 회장의 재산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는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서 “유산을 하나도 안 받았다. 돈을 빌려 떠돌아다녔다”고 쓴 바 있다. 은퇴한 뒤에도 별다른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CJ의 강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재계에서는 ‘CJ가 이번 소송을 측면 지원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지속적으로 나왔었다. 법무법인 화우 측은 “인지대는 이맹희 전 회장이 부담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자금 출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CJ는 줄곧 “이맹희 전 회장 개인의 소송으로, CJ그룹과는 무관하다”고 말해왔다. 항소 여부를 결정할 당시에도 “이재현 회장이 원만하게 마무리 짓자고 간곡히 청했지만 이 전 회장은 항소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 항소심에서 뒤집어질 가능성은
1심에서 이맹희 전 회장의 주장이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아 2심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현재로서는 우세하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맹희 전 회장 측이 항소한 것은 치밀한 법리적 검토를 바탕으로 일부 승소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어서라는 관측도 나온다.
항소심에서는 1심 법원이 일부 재산을 상속 재산으로 인정하면서도 법률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는 기간이 지났다고 판단한 만큼 제척기간을 둘러싼 법리 공방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맹희 전 회장 측은 항소심에서 상속권의 침해 시점을 이건희 회장이 상속받은 차명주식을 실명 전환한 2008년 12월로 입증하는 데 주력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상속권 침해 시점을 이건희 회장이 차명주식으로 이익배당금을 받았던 1989년 12월로 판단해 제척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이맹희 전 회장의 청구를 각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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