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썼을 때 김지하는 수배 상태였다. 1973년 겨울 어느 날 여관방에서 자고, 다음 날 새벽 친구 집으로 도피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을 때, 누군가 벽에 분필로 써 놓은 ‘민주주의 만세’라는 글귀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는 하루 종일 머릿속으로 이 글귀를 읊조리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시가 일반에 공개된 것은 그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감형되어 잠시 석방되었던 1975년 2월 17일자 본보를 통해서였다(사진).
우리는 지금 무감각해질 정도로 민주주의를 향유하고 있지만 한때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진실, 자유, 정의, 양심을 말하며 내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하고 싶었고, 하고 싶은 말도 맘껏 하면서 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붙잡혀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삶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져 지금까지도 고통받는 사람이 아직 많다.
‘김지하와 그의 시대’를 연재하겠다는 계획은 1월 김지하 인터뷰가 계기가 되었다. 본보 1월 9일자에 인터뷰가 나간 뒤 많은 독자로부터 ‘우리가 누리는 경제적 풍요와 민주주의가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희생의 결과라는 것을 너무 쉽게 잊은 것 같다. 그 시대를 더 알고 싶다’는 전화와 e메일이 많았다.
이에 따라 우선 1991년 본보에 시작했다가 중단하고 2000년 출간한 김지하 회고록을 토대로 그의 증언을 들었다. 인터뷰는 2월에 집중되었다. 거의 100시간이 걸렸다. 여기에 각종 자료와 관련자 인터뷰가 더해졌다.
1960, 70년대 신문에 민주화투쟁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유신정권하 소위 긴급조치 시대(1974∼1979년)에는 엄격한 보도통제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기자들의 법정 취재조차 큰 사건의 경우에만 가능했다.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대였으며, 반정부 민주화 운동이 가열차게 일어났던 그 시대를 우리가 잘 모르는 이유다.
1961년의 군사쿠데타는 산업화의 출발이기도 했지만 민주화 투쟁의 출발이기도 하다. 본보는 이달 1일 창간 기획을 통해 군복을 벗고 민선 대통령으로 갓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이 가난과 도탄에 빠진 국민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각오로 서독 방문길에 나선 사연을 조명한 바 있다. 그러면서 이념의 잣대가 아닌 역사의 주인인 국민의 관점에서 그 시대를 소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연재는 그 2편 격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지난 1960, 70년대를 다시 보아야 하는가. 바로 민주화와 산업화 세력의 ‘통합적 역사인식’ 없이는 통일 한국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화합은 최대 이슈였지만 탕평 인사를 하겠다는 약속 외에는 통합의 구체적 내용과 비전은 제시되지 않았다. 호남 출신 인사들을 몇몇 요직에 등용한다고 국민 통합이 된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국민 통합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가치 통합, 세대 통합이 없이는 힘들다. 그동안 두 세력은 서로에 대해 가시 돋친 비난을 해오며 선거 때마다 충돌해 왔다. 산업화 세력은 민주화 세력을 향해 권력지향성이 강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하다 비판해 왔으며 민주화 세력은 산업화 세력을 향해 소통능력이 부재하고 부패한 세력이라고 비판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 연재를 준비하며 기자가 느낀 것은 산업화, 민주화를 분리해서 봐서는 안 되고 국민적 입장에서 통일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화’니 ‘민주화’라는 말로 세력을 구분하고 때로는 리더를 중심으로 이를 섞어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역사를 삶이 아닌 관념 속에서 보거나 정치를 삶이 아닌 공학적으로 보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산업화 민주화의 가치들은 머릿속에서는 서로 다른 것들일지 몰라도 대한민국 국민의 삶 속에서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은 한마디로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인권, 민주주의의 확대라는 국민적 소망의 실현 과정이었다. 각 분야에서 리더들이 큰 역할을 하긴 했으나 산업화 민주화의 주역은 모두 국민이었다.
이번 기획을 통해 지난 시절 우리는 정부는 정부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모두 노력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민주화 산업화를 거의 동시대에 성공시킨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래의 주인인 젊은이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긍지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 나아가 통일의 문을 열어젖히는 세대가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리즈를 시작한다. 연재는 월∼금요일 주 5회 게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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