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 <1> 1974년 민청학련 사형선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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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을 주시니 영광” 우린 죽음을 이겼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로 법정에 선 김지하. 동아일보DB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로 법정에 선 김지하. 동아일보DB
‘이철 사형! 유인태 사형! 김병곤 사형! 나병식 사형! 여정남 사형! 김지하 사형! 이현배 사형!’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깊은 늪과 같이 적막하던 법정에 검찰관의 긴장된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방청석에서 낮은 비명이 새나왔다.

1974년 7월 9일 서울 용산구 육군본부 건너편 비상군법회의 법정.

유신시절 최대 반독재투쟁사건이라 할 만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검찰의 구형이 내려지고 있었다. 재판은 6월 15일부터 진행됐지만 엄격한 보도통제가 취해지고 있었다. 법정은 바깥세상과는 유리되어 밀폐된 진공의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중앙 정면 단상에는 붉게 상기된 얼굴의 재판부가 앉았다. 복도는 물론이요, 법정 안까지 총을 든 헌병들이 늘어섰다. 흉가(凶家) 같은 막사를 개조해 만든 서른 평 남짓 법정 안은 30도가 넘는 바깥의 찌는 듯한 폭염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상한 한기(寒氣)가 감싸고 있었다. 칼날이 선 것처럼 날카로운 재판정은 살기(殺氣)까지 느끼게 했다. 열어젖힌 창문으로 매미 울음소리만 쏟아져 들어왔다.

흰 죄수복을 입은 피고인들은 오랏줄에 묶이고 두 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나란히 앉았다. 지난 2개월간 조사를 받으며 몽둥이 고문, 잠 안 재우기 고문, 전기 고문 등 온갖 고문을 다 당해 거의 초주검이 된 모습이었다. 피고인 1인당 가족 1명으로만 제한된 법정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가족들도 모두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날 재판은 재판이라기보다 사법을 빙자한 ‘살인’이자 군사 작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재판의 피고인들이 민간인이었기 때문에 서울형사지법에서 해야 했으나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8일 발표한 긴급조치 2호에서 긴급조치를 위반한 사람에 대해서는 무조건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한다고 적시했다. 죄형법정주의나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깡그리 무시한 처사였다. 군사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돼 적법 절차가 보장되지 않았다.

가족 면회는 일절 허용되지 않았으며 현장 검증은 물론 변호인의 증인 채택 요구도 거부됐다. 법정심리나 변호인의 반대신문 같은 것도 없었다. 변호인들은 변론요지서조차 작성할 수 없었다. 피고인의 이름 주소 직업 등 인정신문만 진행됐다. 검찰이 내놓은 증거물이란 것은 트랜지스터라디오, 시중에서 파는 일본책 몇 권, 김지하의 오적(五賊) 시, 학생선언문 같은 것들이 고작이었다. 유일한 증거라고 하는 것이 수사관들이 부르는 대로 받아썼거나 각본에 따라 써 넣은 ‘피의자 심문조서’였다.

이날 법정에 선 피고인은 모두 32명. 공소장은 549쪽, 판결문은 423쪽에 달했다. 죄목은 긴급조치 1호 및 4호,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내란 선동 등이었다. ‘(유신) 헌법을 고치자’고 입만 뻥긋해도 잡아 가둔다는 긴급조치 1호만으로는 국민의 저항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은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 김지하 “법 없애고 군인으로 민주주의 할거냐” ▼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 사건’이라는 특정 사건 하나만을 겨냥해 만든 법률이라는 점에서 초유의 법령이었다. 우선 수사 대상자가 엄청났다. 중앙정보부는 총 1024명(자수 266명)을 조사했고 이 중 745명을 훈방하고 253명을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송치했다. 그 가운데 기소된 사람은 180명이다.

비상군법회의는 초스피드로 재판을 진행해 첫 공판을 연 지 불과 24일 만인 7월 9일 1심 공판에서 7명에게 사형, 7명에게 무기징역, 12명에게 징역 20년과 15년, 6명에게 징역 15년 등의 초중형을 구형했다(인권변론자료집).

엄청난 형량에 변호인들이 당황하고 흥분했다. 세 번째로 나선 강신옥 변호사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과연, 법은 정치나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하고 느낀다. 지금 검찰관들은 나랏일을 걱정하는 애국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고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다. 이는 사법 살인 행위가 될 수가 있고….”

그의 폭탄 발언에 법정 안의 긴장은 최고조로 높아졌다. “본 변호인은 기성세대이기 때문에, 그리고 직업상 이 자리에서 변호를 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하여 피고인석에 앉아 있겠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변론은 중지당했고 재판장은 휴정을 선언했다. 결국 강 변호사는 일주일 뒤 법정모욕죄로 구속된다. 변호사가 변론 때문에 구속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실은 당시 국내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74년 7월 19일자 뉴욕타임스가 1면 기사로 보도한 뒤 8월 8일 정기국회에서 법무부 장관의 답변을 통해서야 국민에게 알려진다. 강 변호사는 14년 뒤인 1988년 3월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았다.

2월 원주에서 기자와 인터뷰하는 김지하 시인.
2월 원주에서 기자와 인터뷰하는 김지하 시인.
사형을 구형받은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이 시작됐다. 모두 비장한 각오가 되어 있었다. 김지하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참새도 죽을 때 짹 하는 법이다. 사람이라고 짹 소리 못 할까 보냐. 법을 이렇게 끌고 가면 앞으로 어느 미친놈이 법을 지키겠느냐. 법이 없어지면 뭘로 민주주의를 할 거냐. 군인들이 다 할 거냐.”

이날 압권은 김병곤이었다. 그는 1971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해 3학년 때에 민청학련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석방됐고 민주화 투쟁을 계속하다 1990년 위암으로 숨진다.

김병곤은 최후진술 순서가 되자 재판정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런데 모두 놀라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던 것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라는 영광스러운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民生)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그의 눈길과 자태에서 속된 삶의 욕구를 훌쩍 뛰어넘은 ‘무념의 경지’가 느껴졌다. 김지하는 훗날 동아일보에 연재한 ‘고행’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당시의 목격담을 이렇게 전한다.

“영광입니다!” 아아, 이게 무슨 말인가? 사형을 구형받자마자 “영광입니다”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나는 엄청난 충격 속에 휘말려 들기 시작했다. 분명히 사형은 죽인다는 말이다. 죽인다는데, 죽는다는데, 목숨이 끝난다는데 일체의 것이 종말이라는데…. 모든 것이 갑자기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데, 그런데 “영광입니다”? 우리가 성자(聖者)인가? … 그렇다. 확실히 그렇다. 우리는 드디어 죽음을 이긴 것이다. 그 지옥의 나날, 피투성이로 몸부림치며 순간순간을 내내 죽음과 싸워 드디어 그것의 공포를 이겨 내 버린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을 이겼고, 죽음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영생(永生)을 얻은 것이다. 그렇다. 그 순간은 무어라고 차마 이름 붙일 수조차 없는, 모든 인간적인 가치와 모든 고상한 것들이 통일되는 빛나는 절정이었다. …엄청난, 엄청난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감사하나이다.” 그리고 또한 말할 수 없이 “영광입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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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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