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3> 피의 화요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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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는 혁명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960년 4월 시위에 나선 시민들의 모습. 4·19는 186명의 목숨을 앗아간 피의 항쟁이자 시민혁명이었다. 동아일보DB
1960년 4월 시위에 나선 시민들의 모습. 4·19는 186명의 목숨을 앗아간 피의 항쟁이자 시민혁명이었다. 동아일보DB
이승만 정부는 1960년 4월 19일 오후 3시 전국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성균관대 3학년생으로 시위에 참가했던 김승균 전 사상계 편집장(75)은 이날을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렀다.

“대학생, 중고교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가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김주열의 죽음과 관련해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 발포가 시작되면서 시위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학생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다.”

이제는 잊었을 법도 할 텐데 당시를 전하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가까운 후배가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서울역 앞에 있던 세브란스병원으로 달려갔다. 며칠 밤을 새워 병상을 지키다 옷을 갈아입으러 명륜동 자취방으로 가려고 나왔는데 시위대가 동대문경찰서에 불을 질렀다는 소리가 들려와 달려갔다. 경찰서 앞에 전매청이 있었는데 경찰 총격으로 담벼락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담 아래에는 시체들이 거적으로 덮여 있었다.”

시신들 중에는 일반 시민도 있었다. 시민들이 학생들과 함께 “(정부를) 갈아엎어야 한다”는 결의로 한덩어리가 되었던 것이다. 4·19는 이처럼 학생들의 데모에서 시민혁명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실제로 3, 4월 항쟁 기간을 통해 전국적으로 186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는 6026명이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 전국 학술토론회 자료집). 4·19는 한마디로 피의 항쟁이었다. 김지하도 이것을 곧 깨달았다고 한다.

“다음 날인 20일 점심 무렵이 되어 동숭동 문리대 앞, 당시 문리대생들에게 유명했던 ‘별장다방’으로 갔다. 착잡한 마음으로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일군의 사람들이 트럭을 타고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지나가는 것 아닌가. 어제 길에서 만났던 대학생들이 아니었다. 구두닦이나 행상들로 보이는 일반 시민들이었다. 10대 청소년도 있었다. 멀리서 ‘따다닥 따닥’ 총소리까지 들렸다. 전날까지만 해도 학생들의 단순 폭발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이건 완전히 혁명이 아닌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장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귓전에서 맴도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발목을 잡았다. “영일아(김지하의 본명),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

가난한 집 외아들을 최고의 대학교에까지 보냈으니 부친이 그에게 거는 기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버거운 기대였다. 전라도(목포) 출신에다 가난뱅이에, 학연도 없고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그가 집안을 일으킨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노을이 질 무렵 나왔다. 발걸음은 집을 향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성북동 간송미술관 앞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래.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다. 그러나… 참가해야 하지 않을까. 조직을 통해서가 아니라 혼자서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를 슬프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살아야 한다. 냉정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조직과는 거리를 두고 참가해야 한다.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지혜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의 귓전에선 “만세! 만세!”를 부르는 시민들의 외침소리가 울리고 눈에서는 태극기 물결이 아른거렸다. 김지하는 그날 밤 고등학교 때부터 써 왔던 철학노트들을 불태워 버렸다. 술 섹스 마약과 자살을 찬미하는 어두운 구절들로 가득했던 노트였다.

계엄령에 잠시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번져갔다. 급기야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먼저 사임을 발표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기자회견에서 밝힌 사퇴의 변은 이랬다.

“3·15 부정선거로 3000만 동포의 울분은 드디어 절정에 달하고 마침내 민족의 정화인 청소년 남녀들이 총탄에 쓰러져 그 고귀한 피가 이 강산을 물들이게 됨을 볼 때 하루라도 이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비통한 심경에 다다른 것이다. 이 대통령은 3·15 부정선거의 불법과 무효를 솔직히 시인하고 12년간 누적된 비정(秕政)에 책임을 지고 물러서야 한다.”

장면 부통령은 3·15 선거에 출마해 낙선했지만 3대 부통령 임기는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 대통령이 물러나고 선거가 무효 처리되면 자연스럽게 대통령 직을 승계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부통령으로서 당연히 져야 할 책임이기도 했지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내기 위해 사퇴했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따르자면, 대통령이 하야하더라도 그 혼란을 틈타 자신이 정권을 잇지 않겠다는 것을 이 대통령에게 보장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승만은 당시 장면과 노기남 대주교를 4·19 배후로 지목하고 있었다. 1999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 연재되어 책으로 묶인 ‘제2공화국과 장면’(이용원)에는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된, 훗날 공개된 기밀문서를 보면 이승만은 4월 21일 경무대를 방문한 월터 매카너기 주한 미국대사에게 ‘이 모든 사태는 장 부통령과 노 대주교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가톨릭 세력을 선동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어떻든 장면 부통령 사퇴 여파는 컸다.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들까지 시위에 나섰다. 지식인 계층으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법무부 장관 권승렬, 신임 외무부 장관 허정도 이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했다. 매카너기 대사도 이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하야를 권했다. 이 대통령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었다. 버틸 수 있는 힘이 다하고 있었다. 결국 26일 오후 1시 라디오 연설을 통해 하야를 발표하고 한 달 뒤인 5월 29일 프란체스카 여사와 미국 하와이로 망명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고작 50달러였던 세계 최빈국의 나라, 36년간 남의 나라 식민지로 살았던 나라를 이어받았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해방되자마자 바로 혹독한 내전(6·25전쟁)을 치르며 전쟁이 끝난 후에야 겨우 정부다운 정부를 꾸릴 수 있었던 비참한 상황에서 12년을 집권했던 그의 마지막은 비극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북한과 일촉즉발로 대치하며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좌지우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뛰어난 국제 감각과 안목, 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외교 대통령이었다. 또 6·25 직후 한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유엔한국위원단 단장으로 방한했던 메논이 “한국에서 경제 발전을 이루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며 자본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반면, 자신을 무지렁이 민중을 개화시켜야 하는 ‘계몽 군주’라고 생각하고 민주주의를 무시했다. 그래서 독재를 했다.

한편, 우리는 이 대목에서 4·19가 시민혁명으로 발전하게 된 사회경제적 배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시민들이 목숨까지 내놓고 “못 살겠다, 갈아보자”고 혁명을 할 때에는 반독재 민주화라는 정치적 요인보다는 더 절박한 이유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당시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닌 ‘가난’이었다. 그때 우리는 못살아도 너무 못살았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김지하#피의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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