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 사람입니다. 내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하고 있겠어요.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아요.”
6·25전쟁 당시 외국에서 유학하던 한국 학생의 편지가 아니다. 미국인인 윌리엄 해밀턴 쇼 해군 대위(한국명 서위렴)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끝난 뒤 이성호 당시 해군 중령(5대 해군참모총장)에게 한 말이다. 미군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군복무를 마친 쇼 대위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2의 조국’ 한국을 위해 자진 재입대해 싸우다 녹번리(현 서울 은평구 녹번동) 전투에서 산화했다.
녹번동 은평평화공원에 가면 그의 한국사랑과 희생정신을 기리는 동상(사진)이 있다. 높이 2.2m(기단 포함 3.5m)의 동상은 정복을 입고 차렷 자세로 자신이 피를 흘렸던 이 땅을 응시한다. 2008년 안병태 전 해군참모총장의 건의로 논의를 시작해 은평구와 재향군인회가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했고, 2010년 6월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해 현 위치에 동상을 세웠다.
1922년 6월 평양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윌리엄 얼 쇼의 아들로 태어난 쇼 대위는 평양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웨슬리언대를 졸업했다. 1943년 해군 소위로 임관해 1945년 노르망디 작전에 참가했다. 1947년 전역한 뒤에는 한국으로 와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영어와 함정 운용술 교관으로 생도를 가르치며 초창기 우리나라 해군 발전에 공헌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50년 하버드대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한국을 돕기 위해 미 해군 대위로 재입대했다. 부모에게 “한국인들은 자유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는데 이를 도우려 흔쾌히 가지 않고 전쟁이 끝난 뒤 돌아가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한국으로 향했다.
이후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한 그는 1950년 9월 22일 미 해병 7연대의 서울 진격에 앞서 녹번리에서 후방정찰 임무를 수행하다 인민군의 총탄을 맞고 산화했다. 사망 당시 29세였던 쇼 대위는 현재 부모와 함께 서울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 묘역에 잠들어 있다. 1956년 정부는 그에게 금성을지무공훈장을, 미국 정부는 은성훈장을 각각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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