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보증 섰다가 집 날리고 가족 생이별… 15년째 피눈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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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보증 덫에 걸린 사람들]<상> 보증피해자 31명의 무너진 삶

정규훈 씨의 삶은 15년 전 연대보증을 서면서 뒤틀리기 시작했다. 추심업자를 피해 다니느라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연대보증 빚은 여전히 남아 있다. 가슴속에는 재기 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지만 정 씨 앞에 놓인 길은 흐릿하기만 하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2003년 여름 어느 날. 영정사진 속 친구는 웃고 있었다. 자살이라고 했다. 다리가 풀렸다. ‘4000만 원….’ 박정범 씨는 친구에게 서준 연대보증의 원금부터 떠올렸다. 친구의 아내는 장례식장에 보이지 않았다. 친구 사업이 망한 뒤 이혼했다. 유치원 다니는 아들만 장례식장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차마 ‘내 빚보증은 어떡하느냐’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그날 이후 박 씨는 은행의 빚 독촉에 시달렸다. 주 채무자가 사망했으니 연대보증인이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25평 아파트는 그렇게 경매에 넘어갔다. 그래도 빚은 남았다. 설상가상, 박 씨가 다니던 상호신용금고가 문을 닫았다. 대주주가 금고 돈을 횡령해 잠적했다.

박 씨가 공사판을 전전하는 사이 은행은 아내의 월급도 차압했다. 200만 원도 채 안 됐던 유치원 기간제 교사 월급에서 ‘딱 숨쉴 정도’만 남기고 다 가져갔다. 아내는 쌀 살 돈이 없어 학교 급식소에서 밥을 얻어 아이들을 먹였다. 아파도 병원 갈 엄두도 못 냈다. 장모는 그냥 뒀다간 아내가 자살할 것 같다면서 쌈짓돈을 털어 생활비를 댔다. 온 가족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갔다.

본보가 만난 연대보증인 31명은 하나같이 끝을 알기 힘든 어두운 터널을 걷고 있었다. 본인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모두 가명으로 썼다.

○ 모멸감으로 시작된 은둔생활

인천의 박정욱 씨(58·여)는 2004년 4월 중순께 은행에서 ‘한번 오시라’는 연락을 받았다. 평소 거래가 많아 항상 친절하던 지점 사람들이었지만 그날은 이상하리만치 목소리가 냉랭했다.

남편 회사가 휴업을 하면서 각종 담보가 압류되고 연대보증을 섰던 아내의 재산도 압류될 예정이라는 게 ‘냉랭한 통보’의 요지였다. 그날부터 박 씨는 주민등록번호를 남에게 얘기할 수 없었다. 카드사에서 개인정보를 조회하려 주민번호를 입력하면 ‘신용불량자’라는 주홍글씨가 단말기에 떴다.

추심업자들은 하루 6번씩 꼬박꼬박 전화를 했다. ‘돈은 마련됐느냐, 언제 갚을 거냐, 담보가 경매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말을 지겹지도 않은지 매번 읊어댔다. 박 씨는 정상 생활을 포기하고 시골로 이사했다. 인생은 삭막해졌다. 박 씨는 “아빠의 빚이 엄마를 거쳐 자식에게 이어지지 않도록 이혼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어머니가 아버지의 빚에 연대보증을 섰다면 아버지 사망 후 상속을 포기해도 보증채무는 이어진다.

유진범 씨는 입사 때부터 알던 회사 동료가 1000만 원을 대출받을 때 연대보증을 섰다 생활고에 시달렸다. ‘겨우 1000만 원’이라고 생각했지만 주 채무자가 잠적하고 유 씨 월급에 압류가 들어오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집에 휴지가 없어 회사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다 썼다.

한곳에서 압류를 하자 은행들은 ‘비 올 때 우산 뺏는’ 속성을 앞다퉈 드러냈다. 주택담보대출 4000만 원을 빨리 갚으라고 했고 카드론 이자율도 크게 올렸다. 연체가 늘고 신용등급이 하락했다. 2금융권 회사 직원이 차 번호판을 떼어 갈 무렵, 유 씨가 평생직장이라고 믿었던 회사는 퇴사를 권했다. 회사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처음 면담 때는 “잘 생각해 보라”더니 2년 정도 지나자 ‘명예퇴직 대상’으로 분류했다. 참기 힘든 모멸감이 몰려 왔다. 나중에 유 씨는 자신이 보증했던 직장 동료가 결혼하기 전부터 알던 여자와 바람이 났고 그 여자에게 돈을 대주느라 여러 사람에게 돈을 꾸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배신감이 더해졌다.

○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

쪼들림은 한때 ‘팀’이던 가족도 흩어 놨다. 이혼은 가족 해체의 종착역이었다. 빚을 물려받지 않기 위한 고육책이지만 가족이 고통 받는 걸 보느니 헤어지기로 결심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박진우 씨(52)는 아버지의 사업대출 보증을 섰다가 아내와 갈라서게 됐다. 1998년 아버지가 부도를 냈을 때, 박 씨는 옷가게 4곳을 운영하는 사장이었지만 보증 빚을 갚기 위해 모두 처분했다. 이후 배달과 막노동 같은 허드렛일을 했다. 집이 은행에 넘어가 시골 친척집에 얹혀살아야 했다. 다 뺏기고 나니 정말 남은 건 숟가락과 젓가락밖에 없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딸과 초등학교 6학년이던 아들의 학원은 사치였다.

2000년 아내와 자녀들까지 자신을 떠나자 박 씨는 완전한 빈손이 됐다. 돈이 없는 것도 힘들었지만 가족을 떠나보내야 하는 건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배우들이 슬픈 장면에서 왜 허탈한 웃음을 짓는지 이해가 간다”고 했다.

박 씨는 이혼 이후 아내와는 연락을 끊었다. 자녀들 소식만 가끔 들을 뿐이다. 어느덧 혼기가 된 딸이 결혼을 한다면 꼭 결혼식장에 가보고 싶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 절박하게 살아왔지만 남은 빚을 모두 청산한 것도 아니다. 박 씨는 지난해 12월 파산신청을 한 뒤 지금은 법원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 ‘경제적 패자’의 부활 기회 박탈

본보가 취재 과정에서 만난 연대보증인들은 대체로 자신이 빌린 돈이 아닌데 금융회사가 주 채무자를 제쳐두고 보증인을 닦달하는 현 상황에 울분을 토로했다.

경기 수원시에 사는 우정철 씨는 처음에는 빚진 친구를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포자기한 상태다. 그는 “어디서 죽었다는 둥 흉흉한 소문이 들리기도 하지만 정확히 어디 사는지 봤다는 사람이 없다”며 “돈도 없을 텐데 이제와 찾아서 뭐하겠느냐”고 말했다.

이들은 또 연대보증 제도가 은행권이 대출을 회수하는 손쉬운 장치로 악용하는 바람에 한번 실패한 사람들이 재기할 기회를 잃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연대보증 가운데 포괄 보증이라는 형태로 보증을 서면 주 채무자가 보증인 몰래 대출을 더 받아도 추가된 금액에 대해 자동으로 보증이 설정돼 보증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것이다.

2건의 연대보증 채무에 3년째 허덕이는 김호중 씨(42)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답을 알면 가르쳐 달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홍수용·이상훈·신수정 기자 legman@donga.com
#연대보증#보증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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