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얼굴’ 만들려고 칼대는 한국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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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비스업 종사자들 ‘입꼬리 성형’ 붐

빅토르 위고(1802∼1885)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웃는 남자’(3월 개봉)의 주인공 그윈플레인은 17세기 유럽에서 입이 찢긴 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늘 웃는 광대로 살았다. ‘손님이 왕’인 2013년 한국에선 ‘미소 우울증’에 빠진 감정 노동자가 미소를 얻기 위해 얼굴에 ‘칼’을 대고 있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A 씨(24·여)는 평소 딱딱한 표정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정성껏 칵테일을 만들어 정중하게 손님에게 건네면 “집 안에 나쁜 일이 있느냐”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직장 상사마저 “표정 관리 좀 잘하라”고 충고할 정도였다.

A 씨는 고민 끝에 2월 억지로 웃지 않아도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 주는 ‘입꼬리 성형수술’을 받았다. 영화 ‘배트맨’ 속 악당 ‘조커’처럼 항상 입꼬리가 올라가 있도록 만들어 주는 수술이었다.

최근 서울 강남 일대 성형업계를 중심으로 입가의 피부를 절개하고 근육을 당겨 올려 웃는 입 모양을 만드는 ‘입꼬리 성형’이 인기를 끌고 있다. “유명 연예인이 입꼬리 성형으로 예뻐졌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단순히 미용 목적으로 찾는 여성 고객들보다 웃는 얼굴이 꼭 필요한 서비스업종 감정 노동자가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지난달 29일 취재팀이 찾은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입꼬리 성형전문 B성형외과 대기실은 상담을 기다리는 젊은 여성들로 붐볐다. 병원 측은 방학이 끝난 비수기임에도 최근 한 달 동안 150여 명이 입꼬리 성형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병원 관계자는 “환한 미소를 원하는 사회분위기 때문에 입꼬리 수술을 받는 사람이 증가하는 추세”라며 “환자 10명 중 7명이 2030세대 서비스업종 여성”이라고 전했다. 취재팀이 성형외과 세 곳을 방문한 결과 현직 스튜어디스, 스튜어디스 준비생, 백화점 판매사원, 미용실 직원, 피부관리사, 학습지 방문교사, 홈쇼핑 호스트 등이 입꼬리 성형수술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미소를 지어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소득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강남의 한 유명 성형외과 의사 C 씨는 주기적으로 자신의 입가에 보톡스를 주입해 입꼬리를 올린다. 그는 “나이가 드니까 입 주변이 처져 억지로 웃기가 힘들다. 웃는 얼굴로 환자를 대해야 수익이 올라가 주위의 시선을 무릅쓰고 보톡스를 맞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수술이나 보톡스 비용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미소 짓는 얼굴을 만들어준다는 미소교정기를 구입하기도 한다. 미소교정기 생산업체 이기혁 대표는 “갈수록 미소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매출이 늘고 있다. 특히 취업 시즌에 잘 팔린다”고 말했다.

감정 노동자의 ‘미소 우울증’은 심각한 수준이다. 전직 은행원 황모 씨(26·여)는 신입사원 연수 당시 새벽까지 웃으면서 인사교육을 받던 중 한 동료가 실신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손님이 부당한 요구를 해도 억지로 웃어야 한다. 그때마다 속으로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며 “하지만 고객으로 가장한 감사 직원이 일부러 진상을 부리고 응대 예절을 평가할 때가 있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우종민 인제대 서울백병원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진짜 감정을 계속 억누르면 나중엔 본인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된다”며 “사회나 회사에서 감정 노동자의 고충을 배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훈상·곽도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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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얼굴#성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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