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서 있던 142×번 참가자에게 속삭였다. 놀라는 대신 그는 심각한 얼굴로 털어놨다. “저희 부모님은 제가 랩 하는 거 몰라요. 대학 졸업하고 직장생활만 열심히 하는 줄 아시는데…. 홍대 앞에서 랩 한 지 2년 넘었거든요. 제 이름은 기사에 안 쓸 거죠?”
기자는 지난달 28일 서울 광진구 광장동 유니클로 악스에 있었다. 엠넷의 ‘쇼미더머니2’ 1차 예선에 참가한 것이다. ‘쇼미더머니’는 국내 유일의 래퍼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지난해 ‘시즌1’이 방영된 데 이어 6월 13일부터 두 번째 시즌이 전파를 탄다.
지난달 14일 이 프로에 온라인으로 지원했다. 랩을 하는 1분 내외의 영상을 첨부해야 했다. 아는 형의 소개로 언더그라운드 래퍼 프리스타로부터 프로듀서 마르코가 만든 힙합 반주 음원을 건네받았다. 기자의 랩 경력은 ‘0’에 가까웠다. 자음과 모음을 이용해 라임(운율)을 맞추고 플로(박자를 절묘하게 타고 넘는 가사의 흐름)를 정리한 뒤 입으로 정확히 재현하는 일은 힘들었다. 직업란에 ‘회사원’이라 적었다.
예선 전날인 27일 밤, 모자 매장을 찾아 난생처음 스냅백(뒷부분에 둘레 조절 밴드가 달린 야구 모자. 챙이 평평한 힙합 모자로도 알려짐)을 구입했다. 큰 챙 밑에 숨으면 긴장감이 덜어질까 싶었다.
28일 오전 9시. 경연장 앞 광장에 참가자들이 운집했다. 20대 초중반 남성이 많았고 절반 정도는 나처럼 스냅백을 쓰고 있었다. 여성과 외국인, 군복을 입은 이도 있었다. “난 힙합의 왕이야. 근데 이런 집합은 아니야!” 여기저기서 입을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예선 참가자는 약 2000명. 남녀 성비는 9 대 1. 지원 연령은 20대가 70%로 가장 많았고, 10대 20%, 30대 이상이 10%였다. 최연소 참가자는 10세, 최고령은 41세. 직업군 가운데는 음악 관련 종사자가 60%로 가장 많았고, 학생(30%)이 뒤를 이었다. 이 밖에 변호사, 회계사, 교사, 소방공무원, 복싱 코치, 종합격투기 선수, 가방디자이너, 제빵사 같은 다양한 이들이 몰렸다.
오전 11시. 행사장 근처 주차장에 10여 명 규모의 사이퍼(cypher·프리스타일 랩 배틀을 위해 둥글게 모인 무리)가 만들어졌다. “헤이! 나의 랩은 우월해. 넌 실력 앞에 우울해. 어서 빨리 가라 군대! 거기 가서 총 메!” 참가자들은 원 안쪽으로 들어와 일대일로 입씨름을 벌였다.
정오. 경연장 내에서 녹화가 시작됐다. 2층 객석에 듀스 출신의 이현도와 전설적인 국내 힙합 듀오 가리온의 멤버 MC메타가 우뚝 서 있었다. 1차 예선을 통과한 이들은 저들을 멘토로 모시게 되리라.
기자는 경연장 밖 맨바닥에 앉아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손가락을 세워 흔들며 힘줄 선 목으로 랩을 하는 다른 이들의 상기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200번쯤 반복했지만 내 랩은 자꾸 입에서 미끄러졌다.
오후 7시 30분. 입장이 시작됐다. 손발이 굳었다. 실내로 들어선 참가자들의 마지막 랩 연습은 제자리를 맴도는 초조한 발걸음과 함께 속삭임에서 중얼거림으로 변했다. 중얼거림은 안쪽 문이 열리자 외침으로 바뀌었다. ‘타다다닷!’ 앞쪽에 있던 참가자는 갑자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큰 소리로 마지막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참가자들은 경연장 바닥에 붙은 300개의 ‘쇼미더머니’ 스티커 앞에 한 명씩 늘어섰다. 심사위원과 5대의 카메라가 왼쪽 끝 참가자부터 대면하기 시작했다. 한두 마디 하다 랩이 엉겨 “수고하셨습니다”란 탈락 선고를 받는 이들도 있었다. 심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상기된 얼굴로 1분 동안 랩을 뱉은 뒤 합격의 표시(‘쇼미더머니’ 스티커)를 가슴팍에 받은 참가자를 향해서는 다른 이들의 부러움 섞인 박수가 쏟아졌다.
심사위원 이현도가 내 바로 왼쪽 참가자까지 닿자 내 심장박동 소리는 귀에 들릴 지경이었다. 마침내 조명이 나를 비췄다. “에이요!”로 목부터 가다듬은 뒤 심사위원의 눈을 노려보며 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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