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여명 모여 광산구에 공동체 형성
96%가 한국국적 취득후 정착 원해
생활 열악… 시의회 지원 조례 추진
고려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두만강 북방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을 가리킨다. 이 고려인의 후손들이 한국으로 일자리를 찾아와 2008년부터 광주 광산구에 하나둘씩 모여 살기 시작했다. 시민사회단체는 이곳에 사는 고려인이 현재 1000명을 넘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80여 년간 타국을 떠도는 방랑자로 살았던 고려인들은 광주에 정착촌을 지으려는 꿈이 있다. 시의회는 다음 달 고려인들을 위한 조례를 전국에서 처음으로 제정할 계획이다.
○ 핍박의 역사, 고려인
광주에 사는 고려인들은 모두 한국인이 되기를 원했다. 중국 조선족 2, 3세대가 한국 국적 취득보다 자유로운 입출국을 원하는 것과 사뭇 다르다. 광주에 사는 고려인 90%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이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시 출신이 전체 60%를 차지했다. 이는 김영술 전남대 대학원 디아스포라학과 연구교수가 3월 23일부터 26일까지 광산구 월곡동에 사는 고려인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다.
설문조사 대상 51%는 ‘한국 국적으로 꼭 바꾸고 싶다’, 45%는 ‘가능하면 바꾸고 싶다’, 4%는 ‘상황이 되면 바꾸겠다’고 답했다. 광주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30%가 ‘아는 사람이 있어서’, 63%는 ‘고려인 공동체가 있어서’라고 답했다. 대부분 광주 생활 13년째인 신조야 광주 고려인센터장(58·여) 등을 의지해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이다.
고려인들의 공동체 의식이 강한 것은 역사적 요인 때문이다. 고려인들은 스스로를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로 흘러간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려인 1세대 대부분은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스탈린 치하에서 러시아 정부가 ‘조선인들은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중앙아시아를 개발하기 위해 강제 이주시켰다. 당시 124개 수송열차로 3만6442가구, 17만여 명이 강제 이주됐다.
1990년대 옛 소련연방이 붕괴된 뒤 중앙아시아에서는 민족주의가 발호했다. 러시아어 대신 우즈베키스탄어를 쓰는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고려인들은 러시아어밖에 몰라 또다시 이방인이 됐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은 농업이 주력산업인 탓에 국민소득이 낮았다. 고려인 3, 4세대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찾아 다시 연해주로 돌아가거나 한국행을 선택했다.
○ 지원조례 처음 제정될 듯
광주 광산구에 고려인 마을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은 무엇보다 주거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비정규직인 이들은 인근에 하남·평동 공단이 있고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곳을 선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전국적으로 고려인 마을은 서너 곳에 있지만 광주처럼 공동체 의식이 강한 곳은 없다. 김영술 교수는 “광주가 전국에서 두 번째로 외국인이 적고 범죄 발생 비율이 낮은 것이 고려인들에게 큰 매력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고려인들은 광주 정착에 큰 관심을 보이지만 정부 지원은 거의 없다. 고려인 대부분은 광산구 월곡·우산동 등에서 쪽방, 원룸 등 열악한 환경에 거주하며 공단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말이 유창하지 못해 또다시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고 호소한다. 고려인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고려인센터, 탁아소, 협동조합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사랑방 역할을 하는 20여 m² 크기의 비좁은 고려인센터에는 일요일마다 100여 명씩 모인다. 부모들은 탁아소 대신 한 달에 20만∼30만 원을 내더라도 한국말을 배울 수 있는 일반 어린이집을 선호한다. 자녀들이 한국말을 배워 한국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시의회는 다음 달 3일 고려인 지원조례를 제정할 계획이다. 지원조례는 고려인 지위 인정, 문화센터 설치, 고려인마을 조성 및 지원 사항, 생활협동조합 지원 내용을 담을 것으로 전망된다. 송경종 시의원은 “고려인촌이 처음 조성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 콘텐츠 등을 담을 수 있는 다문화정책이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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