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한구석 비닐봉지 속에 담겨 있는 음식물쓰레기는 어느 집이나 골칫덩어리다. 전용수거통으로 지저분한 ‘외모’는 어떻게 가릴 수 있지만 고약한 ‘속내’는 어쩔 수 없다. 수거함에 버리는 일은 더욱 고역이다. 부부가 “당신이 버리라”며 싸움을 벌이는 일도 흔하다. 누가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느냐가 가정 내 ‘주도권’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앞으로 일부 신규 주거지역에서는 음식물쓰레기로 인한 가정불화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금지됐던 주방용 오물분쇄기(디스포저·disposer)가 일부 지역에 한해 빠르면 올해 말부터 허용되기 때문이다. 디스포저는 싱크대에서 하수구로 내려가는 길목에 부착돼 강력한 모터로 칼날을 돌려 음식물쓰레기를 잘게 분쇄한 뒤 하수구로 직접 배출하는 기계다. 골치 아픈 음식물쓰레기를 버튼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제품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 18년 만에 허용 추진
환경부는 그동안 금지됐던 디스포저를 허용키로 방침을 정하고 올해 안에 하수도법을 개정해 구체적인 기준과 절차 등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6일 밝혔다.
디스포저가 국내에 선보인 것은 1980년대 초반. 일부 업체가 외국산 제품을 수입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1985년 당시 공업진흥청은 디스포저에 대해 전기용품 형식승인을 내주며 판매를 허용했다. 그러나 비싼 가격 때문에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하수처리 능력이 떨어져 수질오염을 초래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하수관을 부식시키고 파손된 틈으로 새어나가 토양을 오염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이런 문제점이 제기되자 정부는 1995년 디스포저 판매 및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이때까지 판매된 디스포저는 약 2만4000대에 이른다.
2007년 1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 공약에 규제완화 차원에서 ‘디스포저 허용 검토’가 반영됐다. 이에 따라 이명박 정부는 2013년 말까지 디스포저 금지 규제를 폐지 또는 개선하기로 결정했다.
환경부는 서울 세 곳(2009∼2010년)과 경기지역 두 곳(2012∼2013년)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했다. 또 지난해 10월에는 제한적 기능의 디스포저 판매 및 사용을 허용했다. 이 디스포저는 음식물쓰레기를 분쇄한 뒤 20%만 자동으로 하수구로 배출한다. 나머지 80%는 회수통에서 꺼내 사람이 직접 버려야 한다. 이에 따라 회수통을 의무적으로 부착한 43종의 디스포저가 환경부 인증을 받아 지난달까지 약 1600대가 판매됐다. 환경부가 올해 일부 지역에 대해 새로 허용하려는 디스포저는 분쇄한 음식물쓰레기 전부를 하수구에 버릴 수 있는 기능을 갖춘 것이다.
○ 어느 지역에서 사용할 수 있나
디스포저 사용이 가능한 지역은 무엇보다 분류식 하수관이 운영되는 곳이어야 한다. 오수관(가정에서 나오는 하수가 흐르는 관)과 우수관(비가 올 때 빗물이 흐르는 관)이 별도로 설치된 방식이다. 분류식이라고 해도 하수관이 지름 200mm 이상이 돼야 한다. 유속도 초당 0.6m 이상이어야 한다.
이런 기준은 음식물쓰레기가 하수관 안에서 퇴적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만약 하수관에 음식물쓰레기가 쌓여 막히면 악취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수처리시설도 주요 기준 중 하나다. 일반 하수에 비해 오염이 심하기 때문에 그만큼 고농도의 하수처리설비를 갖춰야 한다. 최근에 만들어진 하수처리장은 대체로 고농도 하수처리 능력을 갖고 있다.
환경부는 2009년부터 서울의 아파트단지 세 곳(강서구 방화동, 노원구 공릉동, 영등포구 영등포동)에서 시범사업을 실시했다. 하수관 퇴적 같은 심각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일부 단지에서 배관이 막히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또 합류식 하수관이 설치된 두 곳에서는 여름철 집중호우 때 역류로 인한 침수 가능성이 제기됐다. 반면 분류식이 설치된 경기지역(남양주시 가운지구, 여주군 능서지구)에서는 큰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 조건과 시범사업 결과를 반영하면 디스포저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주로 신규 개발지역이다. 경남 진주 같은 혁신도시, 강원 원주 같은 기업도시 등에는 설치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기 성남시 분당, 안양시 평촌 등 1기 신도시의 경우 분류식 하수관이 대부분이지만 노후한 상태다. 앞으로 하수관을 개·보수하면 디스포저 사용허가 지역에 포함될 수도 있다.
서울 부산 등 합류식 하수관이 많은 도시는 대부분 불가능하다. 서울의 경우 하수관의 17%가 분류식이지만 다시 합류식으로 연결돼 하수처리장까지 가는 곳이 많아 디스포저 사용이 어렵다. 다만 분류식이면서 하수처리장과 직접 연결된 강남구 대치동, 강서구 방화동 등 일부 지역에서는 가능성이 있다. 오재일 중앙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는 “디스포저 허용조건을 만족하는 지역은 전국적으로 10% 이내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 어떻게 설치할 수 있나
디스포저 허용 지역이 되려면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각 지역 환경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허용 지역으로 공고되면 각 가정에서는 환경부 지자체 홈페이지 공고를 통해 확인하고 설치할 수 있다. 환경부는 빠르면 올해 안에 이런 절차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디스포저를 수입 생산 판매하는 업체는 국내에 50개 정도 있다. 이 가운데 40개 안팎의 업체 제품이 환경부 인증을 받았다. 환경부는 디스포저 설치업 등록제를 도입할 계획이다. 현재 시판 중인 디스포저의 가격은 60만 원 안팎이다. 시범사업 지역에선 주민의 90% 이상이 디스포저 사용에 만족했다.
○ 허용 지역 아니면 사용할 수 없나
디스포저를 허용 지역 밖에서 설치 사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다만 허용 지역이 아니라도 ‘제한형 디스포저’(20% 미만 배출) 사용은 가능하다.
한 번 설치한 디스포저는 가정에서 떼어낼 수 없다. 아예 설치 때부터 업체가 분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불법 사용이 적발되면 설치 업체 관계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 처분이 내려진다. 해당 가정도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그러나 업체와 소비자가 서로 동의해 불법 설치하면 사실상 단속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다. 환경부 관계자는 “불법을 가리기 위해 일반 가정의 싱크대까지 확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며 “그 대신 설치 업체 관리를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 “환경의식 후퇴… 가스폭발 우려” vs “선진국은 일반화… 기술력 충분” ▼
■ 오물분쇄기 뜨거운 찬반 논란
환경부가 6일 주방용 오물분쇄기(디스포저) 허용 방침을 밝히면서 찬반 논란이 뜨거워지고 있다.
반대 측 전문가들은 디스포저 사용으로 음식물쓰레기가 퇴적하면 하수관의 흐름이 정체되고 가스 폭발이 일어날 우려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재활용쓰레기의 분류 배출에 대한 의식도 후퇴시킬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정승헌 건국대 동물자원과학과 교수는 “디스포저를 신규 개발 지역에 허용한다고 하는데 정작 수요는 대도시 고층아파트에 많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허용된 지역과 허용 안 된 지역 간 형평성 논란이 일어날 수 있고 결국 불법 설치가 늘어날 개연성이 높다”며 “현실적으로 단속이 불가능해 이런 지역에서는 하수관이 막히거나 가스 폭발 사고가 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김미화 자원순환사회연대 사무총장은 “다른 폐기물에 비해 음식물쓰레기는 분류 배출 의식이 매우 높은데 자칫 ‘무조건 버려도 된다’는 인식이 은연중에 생길까 걱정스럽다”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100%에 가까운 분류 배출 체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음식물쓰레기를 수거해 퇴비 사료 등으로 재활용하는 업체들도 반대하고 있다. 이석길 한국음식물류폐기물자원화협회 사무실장은 “디스포저를 허용하면 기존의 재활용 시설은 무용지물이 되고 직원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다”며 “자원을 재활용하지 않고 버리는 것은 국가적으로 낭비”라고 말했다.
반면 찬성 측 전문가들은 현재 하수시설과 기술력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는 의견이다. 배우근 한양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는 “국내 하수관로와 하수처리장은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며 “기술적으로 해결 가능한 것은 과감하게 허용해야지 계속 시민들에게 불편을 감내하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고 말했다. 시범사업에 참여한 오재일 중앙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는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는 디스포저를 주방용품의 하나로 여길 정도로 널리 사용하고 있다”며 “디스포저 허용으로 주민들이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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