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가 나쁜 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6일 03시 00분


■ 젊은층 일각, 부정적 의미로 사용

“주가 하락… 오늘 주식 민주화됐다” “시험 망쳐… 교수에게 민주화당했다”

시크릿 리더 전효성
시크릿 리더 전효성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

4인조 걸그룹 ‘시크릿’의 리더 전효성(24·여)이 14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던진 이 말이 온라인에서 큰 파장을 낳고 있다. 앞뒤 문장의 논리적 연결이 어색하기만 한 이 말이 왜 평지풍파를 일으킨 걸까.

전효성은 ‘팀이 개성 없이 획일화된다’는 뜻으로 ‘민주화’라는 표현을 썼다. 전효성의 사례가 보여주듯 요즘 일부 젊은층 사이에선 민주화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총칭하는 은어처럼 사용된다.

주식을 즐겨 하는 직장인 이모 씨(28)는 보유 주식의 주가가 떨어질 때마다 “오늘 주식 민주화됐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대학원생 강모 씨(27)는 문제가 어려워 시험을 망치면 “교수한테 민주화당했다”며 혀를 내두르곤 한다. 우파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서는 게시글에 대한 찬반 의견 표시란의 ‘반대’를 의미하는 아이콘 이름이 ‘민주화’다.

전효성의 발언이 알려지자 인터넷은 뜨겁게 달궈졌다. 진보 진영은 “민주화 세대의 고귀한 가치가 담긴 단어를 왜곡해 부정적인 의미로 쓰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강경 우파 진영은 전 씨를 적극적으로 옹호해 대결 양상을 보였다.

진보 논객인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15일 트위터에 “(전효성 논란은) 보수정권 6년 만에 극우적 사유가 암암리에 젊은 세대의 정신세계에까지 침투했음을 보여주는 슬픈 징조”라고 적었다.

반면 강경 우파로 보이는 일부 시민은 시크릿의 음원을 집단 구매하며 ‘전효성 기 살리기’에 나섰다. 일베에는 시크릿이 데뷔 이후 발표한 노래 41곡의 음원(총 2만4600원)을 전부 샀다며 구매 내용을 인증하는 글이 수백 개 올라왔다. 지인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시크릿 CD를 100장 샀다는 인증 글도 눈에 띄었다. 음원사이트 멜론 실시간 차트에서 10위권이었던 시크릿의 신곡 ‘YooHoo(유후)’는 15일 새벽 한때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전 씨가 광고모델로 활동하는 속옷 브랜드의 인터넷 쇼핑몰에도 구매 행렬이 이어져 대부분의 속옷이 품절됐다.

전 씨는 파문이 확산되자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하고 적절하지 못한 단어를 사용한 점 반성하고 있다.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민주화 단어 사용을 놓고 논란이 빚어진 것은 이번뿐이 아니다. 지난해 2월 게임방송 온게임넷의 한 프로그램에서 진행자 김태형 씨가 리그오브레전드(LOL)를 방송하던 중 자신의 캐릭터가 적들을 휩쓸자 “이거 민주화인데?”라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김 씨는 “게이머들이 적들을 물리치면 ‘민주화시켰다’라는 말을 쓰길래 원래 그렇게 쓰는 말인 줄 알았다.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해명했다.

‘민주화’라는 단어가 일각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때부터라는 게 정설이다. 당시 “미국 소를 먹으면 다 죽는다” “광우병이 공기로도 전염된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루머가 좌파 진영을 중심으로 확산됐을 때 일부 블로거가 과학적 자료를 대며 반박글을 올렸다가 맹비난을 받자 “블로그가 민주화당했다”는 말이 등장했다. 그 후 이 단어가 강경 우파를 중심으로 자주 쓰이면서 일반 청소년들에게까지 은어처럼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민주화란 단어를 왜곡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행동이다. 하지만 이런 왜곡된 현상의 바탕에는 민주화라는 가치를 특정 정치세력과 좌파가 마치 자신들의 독점물인 양 행세해 온 데 대한 피로감과 반발심이 깔려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보수논객인 전원책 변호사는 “국내 좌파세력이 민주화를 프로파간다에 이용하며 독점해 오다가 젊은층에게 역풍을 맞은 것”이라며 “민주화가 계속 부정적인 의미로 패러디되면 본래의 뜻까지 사라질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 좌우 세력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만 하다 보니 젊은층도 그렇게 길들여졌다”며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나와 다른 너’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라고 지적했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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