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 때 이른 초여름 날씨에 이창섭(40) 남양유업대리점피해자협의회(협의회) 회장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난겨울엔 칼바람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얼굴이다. 1월 28일부터 시작한 협의회의 남양유업 본사 앞 항의 시위가 101일째를 맞은 날, ‘내가 한 주문 발주 왜 맘대로 수정하냐’ 등의 피켓을 들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이 회장을 만났다.
그는 최근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한 ‘남양유업 사태’의 핵심 인물이다. 2010년부터 만 3년간 남양유업 서울 왕십리대리점을 운영하며 겪은 각종 부당행위를 폭로해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다. 그가 밝힌 내용은 이른바 ‘갑’ 지위에 있는 남양유업 본사가 ‘을’ 대리점에 △물품을 주문량 이상으로 보내 매출을 높이는 ‘밀어내기’ 영업 △떡값과 전별금 등 부당한 금품 요구 △유통기한 임박 상품을 보내는 폐기비용 전가 △유통업체 파견직 사원 임금 떠넘기기 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것. “우유목욕해도 남아 한 달 900박스 폐기도”
최근 협의회가 공개한 녹취록을 통해 이러한 주장이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나면서 후폭풍이 거세게 일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남양유업 현장조사에 나섰고, 검찰도 5월 2일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소비자단체와 편의점 CU, GS25, 세븐일레븐 점주 등을 중심으로 남양유업 제품 불매운동도 확산 중이다. 이 회장은 “이러한 사회적 관심이 지나가는 바람으로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변화의 시작이 되면 좋겠다”며 입을 열었다.
▼ 처음 싸움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리라고 예상했나.
“그런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남양유업 대리점을 하는 동안 매달 1500만 원 꼴로 ‘밀어내기’를 당했다. 매일 오전 2~3시부터 밤 7~8시까지 일하는데 적자만 늘었다. 부당한 요구를 너무 당당하게 쏟아내는 본사 측 태도에 인간적인 굴욕도 느꼈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는데 헤어날 방법이 없더라. 주위를 돌아보니 이런 상황에 놓인 게 나뿐이 아니었다. 다른 대리점주들도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알고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1월 몇몇 점주들과 함께 남양유업에 시정을 요구하기로 한 게 이렇게 확대된 것이다.”
▼ ‘밀어내기’는 어떻게 이뤄지나.
“예를 들어 내가 우유 5박스를 주문했다고 치자. 본사에서는 전산 데이터를 조작해 강제로 20박스, 30박스 이런 식으로 막 보내버린다. 그다음 물품 대금을 강제로 입금하라고 하는 거다. 그 물건을 어떻게 다 소화하겠나. 할인판매를 하고 1+1 판매도 해보고, 그래도 안 되는 건 불우이웃 시설 등에 기부하거나 이웃 사람들 나눠주고, 폐기도 한다. 대리점주는 그걸 다 손실로 떠안는 거다.”
2010년부터 2년간 남양유업 서울 보문대리점을 운영하다 막대한 손실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해 11월 문을 닫았다는 정승훈(43) 협의회 총무도 “본사의 밀어내기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을 보탰다. 그는 “독거노인 등 어려운 이웃에게 늘 우유를 갖다주니 동네에서 기부천사로 통했다. 이웃에 무료로 나눠주고, 온 식구가 우유목욕을 해도 남아 한 달에 900박스를 내다 버린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2년간 약 2억4000만 원 손해를 봤다고 밝혔다.
▼ 못 판 물건을 반품할 수는 없나.
“반품을 받아주면 뭐가 문제겠나. 협의회가 공개한 녹취록 중 본사 영업사원이 대리점주에게 폭언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 배경이 바로 반품 문제다. 한 대리점주가 냉장 저장고가 꽉 찰 만큼 물건을 받았는데도 계속 밀어내니까 그걸 남양유업 창고로 반송한 거다. 영업사원이 그 사실을 알고 ‘감히 반송을 하느냐’면서 욕설을 했다. 가끔 생색내기 식으로 반품을 받아줄 때가 있긴 하다. 1만 박스쯤 밀어낸 뒤 한 10박스쯤.”
▼ 모든 남양유업 대리점주가 그런 피해를 보고 있다는 뜻인가.
“전국에 남양유업 대리점이 1500개쯤 된다. 그중 피해 안 본 곳이 없을 거다. 지금 전국 각지에서 제보가 쏟아지고 있다. 본사 눈치가 보여 직접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는 대리점주들이 ‘이런 상황에서도 밀어내기를 한다’며 증거자료를 보내고 있다.”
▼ 이렇게 피해가 막대한데 왜 본사 눈치를 보나.
“생계 때문이다. 우유 대리점은 시작할 때 큰돈이 든다. 저장고와 차량 등을 마련해야 하고, 권리금도 수천만 원 수준이다. 그렇게 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남양유업이 계약을 해지해버리면 순식간에 전 재산이 날아가는 거 아닌가. 나만 해도 1월 28일 남양유업 문제를 제기한지 사흘 만에 계약을 해지당했다. 재산과 우리 가족의 생계, 나의 미래가 한꺼번에 날아간 거다.” “잘못 시인 정식사과 뒤 방지책 마련해야”
▼ 밀어내기뿐 아니라 명절 떡값 등 부당한 금품 요구 문제도 지적했는데, 이것 역시 모든 대리점주가 공통으로 당한 피해라고 보나.
“그렇다. 남양유업 대리점을 시작한 뒤 명절 때마다 본사 직원에게 떡값을 줘야 했다. 이 회사의 관행이다.”
협의회가 4월 남양유업 본사를 상대로 낸 고소장에는 남양유업 직원들이 대리점주들에게 명절 떡값뿐 아니라 직원들의 퇴직 또는 인사이동 시 전별금을 요구하고, 직원 가정에 경조사가 있으면 하례금도 받아갔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를 거절하면 “사장님, 대리점 그만하고 싶습니까?” “하기 싫으면 대리점 그만두시죠”와 같이 계약을 해지할 듯한 발언을 하거나 평소보다 많은 양의 밀어내기를 하겠다고 겁을 줬다는 것이다.
협의회 측은 본사가 실적 좋은 대리점에 판매장려금을 지급한 뒤 60%가량을 다시 리베이트로 받아가는 ‘관행’도 폭로했다. 정승훈 총무는 5월 7일 본사 직원이 이 사실을 시인하는 내용의 녹취록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이외에도 여러 녹취를 확보하고 있다”며 “그동안은 이런 내용을 공개하면 남양유업 불매운동이 일어 대리점주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주저했다. 그런데 본사가 계속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명예훼손, 사기 등의 혐의로 고소해 증거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 실제로 최근 남양유업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현직 대리점주들 중 협의회 활동에 불만을 표시하는 이들은 없나.
“현재까지는 전혀 없다. 오히려 문자메시지와 전화 등으로 격려 및 지지를 보내주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그릇된 관행이 바뀌어 정상적인 환경에서 대리점을 운영하기를 바라는 마음일 거다.”
이 회장은 “1월 처음 거리에 나섰을 때부터 우리 요구는 변하지 않았다. 남양유업이 잘못을 시인하고, 정식으로 사과한 뒤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이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거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인터뷰 다음 날인 5월 9일 오전 남양유업은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실적이 부진한 지점에서 신제품이나 회전이 안 되는 제품을 밀어내기하는 관행이 있었다”고 시인한 뒤 대국민 사과를 하고 “영업환경을 대대적으로 점검해 이러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게 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또 “협의회에 대한 경찰 고소를 취하하고 화해 노력에 나서겠다. 대리점주에 대한 피해보상 방안을 마련하겠다”고도 밝혔다. 이에 대해 협의회는 “피해 당사자인 대리점주 측과 전혀 상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점에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의 진정성에 의심이 간다”며 피해 대리점에 대한 직접적인 사과와 구체적인 손해배상 계획 등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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