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한쪽 손발로 뛴다, 그들 손발이 되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3일 03시 00분


13일 서울 중구 동국대 중앙도서관 옥상 벤치에서 지성호 씨가 바지를 걷어 보이고 있다. 왼손과 왼 다리가 각각 의수, 의족이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3일 서울 중구 동국대 중앙도서관 옥상 벤치에서 지성호 씨가 바지를 걷어 보이고 있다. 왼손과 왼 다리가 각각 의수, 의족이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달리는 열차에서 몇 번 뛰어내리다 보면 저절로 요령을 익히게 된다. 열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싶으면 사다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준 채 한쪽 다리를 땅에 슬그머니 내려놓아 본다. 발바닥이 튕겨 나오면 아직 때가 아니다. 땅에 닿으면 앞구르기를 해야 한다. 충격을 다리로만 받았다간 뼈가 부러진다. 사람들은 오전 2시 석탄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달리는 화물열차 옆 사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
탈북자 정유미 씨(오른쪽)가 4월 6일 열린 제2회 ‘북남살롱’에서 북한의 소비문화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탈북 7년차인 정 씨는 세련된 여대생 같은 모습이었고, 북한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았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탈북자 정유미 씨(오른쪽)가 4월 6일 열린 제2회 ‘북남살롱’에서 북한의 소비문화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탈북 7년차인 정 씨는 세련된 여대생 같은 모습이었고, 북한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았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996년: 살려주십쇼, 그래야 가족이…

1996년 3월 7일 새벽, 22호 정치범수용소에서 출발한 석탄 운반 화물열차의 기관사는 회령역에 들어갈 때 감속 타이밍을 놓치고 급하게 기차를 세웠다. 그 바람에 함경북도 회령시 세천노동자구(區)에서 석탄을 훔치러 몰래 열차에 올라탄 마을 주민들은 회령역 직전에 열차에서 뛰어내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열네 살 소년 하나는 화물열차 옆에 계속 매달려 있다가 승강장 구조물에 받혀 몸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기이하게도, 소년이 정신을 잃었던 시간은 2, 3초 정도에 불과했다. 눈을 떠보니 역으로 들어가는 기차가 보였다. 잘린 왼쪽 다리도 보였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다리를 지혈해야겠다 싶어서 손을 뻗었다가 왼손도 절반가량 잘려 있음을 알았다. 사람의 손가락뼈라는 게 성냥개비처럼 가늘어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너무, 너무 아프다는 생각도.

세천노동자구 주민들은 석탄을 훔쳐 최소 수십만 명에서 최대 300만 명까지 굶어죽은 것으로 알려진 ‘고난의 행군’ 시기를 버텼다. 이틀만 굶으면 누구나 도둑이 된다. 작업자들이 기계부품을 다 뜯어서 내다 파는 통에 지하수를 퍼낼 펌프가 작동하지 않아 멀쩡한 광산이 폐광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경비가 삼엄한 정치범수용소 탄광에서는 석탄이 계속 생산됐다. 화물열차가 정치범수용소에서 청진화력발전소로 석탄을 싣고 갈 때면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열차에 올라 탄을 훔쳤다.

석탄 도둑질은 2인 1조로 한다. 달리는 열차 위에서 자루에 석탄을 퍼 담고, 회령역 근처에서 자루를 밖으로 던진다. 2인조 중 한 명이 달리는 열차에서 먼저 뛰어내려 자신들이 던진 자루를 지킨다. 다른 한 사람이 리어카를 가져오면 석탄을 싣는다.

“사람 살려! 살려주시오!”

손과 다리가 잘린 소년은 기면서 울부짖었다. 동네 사람들은 손을 내미는 대신 피 웅덩이 속에서 허우적대는 소년의 몸을 뛰어넘어갔다. 자루를 던진 곳에 빨리 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석탄을 뺏길 우려가 있었다. 소년은 병원에 실려 가 수술을 받을 때까지도 정신을 잃지 않고 외과의사에게 빌었다. “날 좀 살려주십쇼. 그래야 우리 가족이 굶어죽지 않습니다.”

2006년: 지성호, 너 도망 안 치냐?

“너 이리 좀 오라. 거기, 무릎 꿇으라.”

목발을 짚고 선 청년의 살기(殺氣)에 주눅이 든 다른 청년이 주춤거리다 무릎을 꿇었다. 세천노동자구 꽃제비 무리의 왕초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새 왕초는 한 손과 한 발이 없었지만 깡다구가 엄청 셌다.

새 왕초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 민가에서 쌀을 얻어오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옥수수를 가축에게 사료로 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하루는 중국에 다녀온 사실을 들켜 보위부에 끌려갔다. 매질에는 단련이 돼 있었는데 “너 같은 병신이 중국에서 거지꼴로 돌아다니면 공화국 국격이 떨어진다”는 소리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1990년대가 지나가자 북한도, 북한 사람도 변했다. 배급보다 시장거래 위주로 세상이 돌아갔다. 시장을 금지하면 폭동이 일어날 분위기였다. 깡다구가 세고 수완이 좋았던 청년은 꽃제비 왕초에서 기업가로 변신했다. 페인트 장사로 큰돈을 벌었다. 남조선 대통령이 공화국에 온다는 소식에 ‘남쪽 사람들은 돈이 많다던데, 그들이 페인트를 팔겠다고 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다. 사람들은 청년을 ‘지성호 사장’이라고 불렀다.

돈을 잘 벌다 보니 경찰이나 보위부와 부닥칠 일이 많았다. 수시로 불러 번 돈의 절반을 이런저런 명목으로 뜯어갔다. 2006년 보위부에 끌려갔을 때의 일이었다. 보위부 요원이 “지성호 너, 도망 안 치냐? 제대로 말하면 살려줄 수도 있는데”라며 웃었다. 자신의 고민을 눈치 챈 것 같아 등골이 서늘했다. 마침 서울에 정착한 동네 친구의 연락을 받고 탈북을 고민하던 참이었다. “내년에 대학 간다”고 자랑하는 친구가 못내 부러웠다.

“한 번 국경을 넘은 과오도 씻지 못했는데 제가 수령님을 버리고 어디를 가겠습니까”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보위부 건물을 나오며 생각했다. ‘지금 이 길로 남한에 가야 한다.’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에게 “석 달 안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곧장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남한으로 들어가는 데 4개월이 걸렸다. 방콕의 이민국 수용소 직원들은 목발을 짚고 라오스 정글을 헤쳐 왔다는 청년의 이야기에 눈이 커졌다. 청년은 남한 관리들이 자신을 ‘지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한국으로 탈북자를 보낼 때 장애인을 더 배려해 먼저 보낸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사이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들이 탈북한 길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려다 붙잡히고, 고문 끝에 숨졌다.

2009년: 너희들은 왜 가만히 있니?

“북한 인권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세상에 알려야 해. 너희는 왜 안 하니? 너희가 북한의 주인이잖아.”

“야, 먹고살기 바쁘다.”

2009년 여름, 동갑내기 룸메이트의 말에 동국대 회계학과 1학년생인 지 씨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박동훈이라는 이름의 룸메이트는 재미동포 2세였다. 한국에 왔다가 교회에서 탈북 청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봉사활동 중이었다. 친해질수록 지 씨의 영어 실력보다는 박 씨의 한국어 실력이 느는 것 같았지만.

“북한의 참상을 묵인하는 건 범죄야. 언젠가 북한에 들어가겠어.”

“북한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다. 미국 시민권자라고 봐줄 것 같냐?”

그해 성탄절에 동훈의 얼굴을 방송 뉴스에서 봤다. ‘북한 인권운동가인 재미교포 로버트 박, 무단 입북.’ 로버트 박, 아니 박동훈은 ‘정치범을 석방하라’고 쓴 편지를 가슴에 품고 찬송가를 부르며 두만강을 건너 지 씨의 고향인 회령시로 들어갔다. 이런 소식을 들은 남한 사람들은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 씨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북한의 실상을 외부에 알리고 북한에 변화를 일으켜야 할 사람들은 우리 아닌가…. 알고 지내는 다른 탈북 청년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뉴스 봤나. 나는 충격적이었는데 너는 어땠나.”

그렇게 남북, 그리고 해외교포 청년이 함께하는 북한인권모임 ‘나우(NAUH)’가 만들어졌다. 2010년 4월 발대식에는 60여 명이 참여했다. 처음에는 서울 강남역과 대학로에서 북한 인권 상황을 알리는 전단을 나눠주고 피켓 시위를 벌였다. 미국의 단파 라디오방송에 코너를 하나 얻어 그해 7월부터 북한으로 방송을 했다. 2011년에는 탈북 여성과 아동 구출사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19명을 구했다.

2013년: 내가 닿은 포구는 어디인가

“제가 함경북도 청진에 살았는데, 이곳 수남시장은 ‘고양이 뿔 빼고 다 있다’고 할 정도로 큽니다. 한국 제품은 물론이고 미제, 일제, 동남아 제품까지 다 살 수 있었어요.”

지난달 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커뮤니티 공간 ‘허브서울’. 강연을 듣고 있는 청중 70여 명 중에는 푸른 눈의 외국인도 더러 있었다. 나우 소속 청년 탈북자들이 북한 주민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남한 젊은이들과 토론하는 기획 강연 ‘북남살롱’이 열리고 있었다.

2000년대 북한 주민의 소비문화를 소개한 강연자 정유미 씨(23·여)가 박수를 받으며 자리에 돌아가자 이동구 나우 부회장이 “지성호 회장님의 생일이 며칠 전이었습니다. 그래서…”라며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깜짝 놀란 지 씨를 나우 운영진들이 일으켜 세우자 청중은 “노래해! 노래해! 울어라! 울어라!”며 짓궂게 합창했다. ‘장군님 노래를 불러 달라’는 요청에 지 씨가 노래를 부르다 가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바람에 말문이 막혔고,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13일 서울 중구 동국대 캠퍼스에서 만난 지 씨에게 그날 부른 노래 제목을 물어 보니 북한영화 ‘곡절 많은 운명’의 주제가라고 했다. ‘곡절도 많은 내 한생 굽이굽이 흘러왔네, 사나운 파도를 넘어 내가 닿은 포구는 어디….’ 이어지는 가사는 ‘장군님의 사랑의 품’이다. 어떤 탈북자는 이 부분을 ‘대한민국 사랑의 품’이라고 바꿔 부르기도 한다. 반면 적지 않은 탈북자가 한국 사회를 못 견디고 제3국으로 다시 탈남(脫南)하기도 한다.

지 씨는 최근 전공을 회계학에서 법학으로 바꿨다.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왔다가 한국에서 법률문제로 고생하는 다른 탈북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나우에 대해서는 더 많은 청년과 일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보기엔 조만간 통일이 갑작스럽게 찾아올 텐데, 그때 북한에 가서 일할 수 있는 한국 청년은 얼마 없다. ‘한국 젊은이들은 통일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그는 “서운하지만 당연하다고도 생각한다”고 답했다.

“북한은 못삽니다. 남한은 잘살고. 가진 걸 나누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가진 것에 너무 집착할 때 사람은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된다. 손과 다리가 잘린 이웃집 소년이 피를 흘리며 “살려주시오!”라고 외쳐도 그 몸을 타고 넘어가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한국 사회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사람 살려!”라는 피맺힌 절규를 외면한 채 ‘석탄 자루’를 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나우 홈페이지 주소는 www.nauh.or.kr이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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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탈북#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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