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 고경원 씨(52)가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있는 자신의 공방에서 작품을 만들고 있다. 40대 중반에 도예가로 새롭게 출발한 그는 “마흔 살은 꿈을 이뤄 나가기에 전혀 늦지 않은 나이”라며 “앞으로 40년은 충분히 새 직업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엄마는 왜 직업이 없어? 친구네 엄마는 직장에 다니는데….”
“나도 한때는 잘나가는 과학자였어! 너희들 키우려고 어쩔 수 없이 그만둔 거지.”
“우리가 언제 엄마더러 직장 그만두라고 했어? 나는 일하는 엄마가 더 좋아.”
연년생인 아들과 딸이 중학생이던 10여 년 전. 그 아이들이 박박 화를 돋웠다. 나이 마흔 가까워 뒤늦게 도예를 시작한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던 순간이었다. 정신도 번쩍 들었다. 비록 지금은 공방에 도예를 배우러 다니는 ‘학생’이지만 10년 뒤에는 번듯한 내 공방을 차리고 아이들에게도 ‘도예가 엄마’ 소리를 당당하게 들으리라….
10년이 흘렀다. 딸은 커서 일본에서 패션기업에 다니고, 아들은 군 복무를 마친 후 대학으로 복귀하는 나이가 됐다. 쉰이 넘은 엄마도 꿈을 이뤘다. 그 엄마는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서 공방 ‘경원 도예’를 운영하고 있다. 바로 도예가 고경원 씨(52)다.
공방을 찾은 기자가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그가 흙 묻은 낡은 작업용 앞치마를 벗고 새 앞치마로 갈아입었다. 딸에게 선물받았다는 자랑을 하면서. 그 앞치마는 ‘일하는 엄마’를 바라던 딸이 도예가가 된 엄마에게 바친 존경의 마음이었다.
도예가가 된 과학자
80학번인 고 씨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 석사를 마치고 KAIST 유전공학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유전공학을 바탕으로 식물유전자 DNA를 추출하는 일을 했다. 신생 학문으로 발전 잠재력이 높은 분야였다. 미래는 창창해 보였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으면서 여느 ‘워킹맘’의 고민이 시작됐다. 직장 근무를 파트타임으로 바꾸고 육아 도우미도 써보았지만 아이들은 엄마 손을 필요로 했다. 막 개업한 회계사 남편은 생활비를 넉넉히 가져다 줄 사정이 못 됐다. 고 씨는 직장을 포기했다. 음대에 가고 싶어 중3 때까지 열심히 피아노를 쳤던 가락이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그는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동네 꼬마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아이들이 엄마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건강하게 자라는 것 같아 뿌듯했다. 하지만 ‘자아’를 방치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떨칠 수 없었다. 시댁 식구들과 함께 사는 것은 큰 불만이 없지만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은 욕구도 컸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엄마의 손도 훨씬 자유로워졌다. 대학 시절부터 가슴에 담아뒀던 꿈이 슬슬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도예!
돌이켜보면, 도자기를 볼 때 마음이 편안했다. 컵 하나도 손으로 빚어 만든 투박한 도자기 컵이 좋았다. 생물학을 전공하면서 늘 흙을 가까이 했었다. 이제는 그 흙을 내 손으로 주물러 나만의 세계를 창조해보리라. 과학자는 어느덧 자유로운 예술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서른여덟 살이던 1999년, 지인의 소개를 받아 전동화 도예가의 공방에 찾아갔다. “선생님, 저 취미로 도예 하려고 여기 온 것 아닙니다. 평생 업(業)으로 할 거예요. 그러니 대학 신입생처럼 여기시고 하드 트레이닝시켜 주세요.”
7년의 수련 기간. 자신을 냉혹하게 담금질했다. 뚝심이 나만의 공방을 가지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지탱해줬다. 이른 아침, 서울 송파구 문정동 집에서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곧바로 경기 안양의 공방에 갔다. 하루 종일 도예를 배우고 저녁에 귀가해 아이들과 시어머니를 위한 저녁을 차렸다. 늦은 밤에는 욕실에서 흙을 주무르며 작업을 이어갔다. 남편과 시어머니의 지지가 큰 힘이 됐다.
2007년, 빚을 얻어 가락동의 주택가에 있는 낡은 건물을 구입했다. 그 건물을 헐고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새 건물을 지었다. 89m²(약 27평) 규모의 지하 1층에는 흙 반죽을 넓적하게 밀어내는 기계와 물레, 전기 가마, 가스 가마를 설치했다. 마침내 그만의 어엿한 공방을 차린 것이다.
2층에는 남편의 회계사 사무실이 있다. 남편은 그에게 매달 월세 60만 원을 꼬박꼬박 받아간다. 공방이 생겼다고 나태해지지는 말라는 뜻일까. 흙으로 충만감을 빚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위험하다 했던가. 뒤늦게 도예가가 된 고 씨는 연일 ‘대박’을 터뜨렸다. 2003, 2004년 관악현대미술대전 특선. 2005, 2006년 경기미술대전 입선. 2006년 경향미술대전 장려상…. 10여 차례 상을 받았고, 개인전도 세 차례 열었다.
학문의 깊이도 커지고 있다. 지난해 8월 단국대 도예과에서 환경조형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김혁수 교수가 이끄는 대형 도자 조형물 소재 및 공정 기술 개발 프로젝트에도 연구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제자’들도 키운다. 그는 공방에서 수강생 15명을 가르치고 있다.
뒤늦게 도예를 시작한 게 장애물이 됐을까. 아니란다. 과학자의 전문성과 주부의 노하우가 오히려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조형작품도 만들지만 접시나 컵처럼 일상에서 쓰는 그릇도 많이 만들어요. 20년 넘은 주부의 살림 노하우가 그대로 작업에 반영되죠. 흙이라는 ‘물성’이 유약, 불과 어울려 탄생한 게 도자기예요. 과학적 지식과 실험 경험이 무척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고 씨 작품의 주요 주제는 릴랙스(relax), 표현 대상은 의자다. 인간이 누리고 싶어 하는 원초적인 안락함을 의자로 빚어낸다. 그 의자 위에 인간의 지친 심신을 편안히 앉히는 상상을 해본다.
심해에서 건져 올린 낡은 유물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작품 곳곳에 스크래치를 내고 탄산동 가루를 녹여 발라 자연스레 푸른 이끼가 낀 것처럼 표현한다. 폭격을 받아 심해로 가라앉은 배에서 출토된 잔해처럼 인체의 각 부위를 나눠놓은 조형 작품도 있다. 생명체의 근원인 고요한 바다. 그 안에서 오랜 시간 침묵해 온 듯한 느낌. 그의 손이 빚어내는 세상이다.
“흙냄새를 맡고 흙을 만질 때 가장 행복해요. 물레를 돌릴 때 한순간 집중을 놓치면 작품은 스르륵 흐트러져버리죠. 흙덩어리에 온 신경을 집중해 내가 원하는 형체를 만듭니다. 그때의 감정은 아마도 새 생명을 만든다는 충만감이 아닐까요? 구운 작품을 가마에서 꺼낼 때는 또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는데요! 늘 똑같이 불을 때지만 작품은 매번 가마에서 다르게 나오거든요.”
말문이 트였나 보다. 고 씨는 소녀처럼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소녀처럼 얼굴까지 발그레해졌다. 그가 흙 묻은 손을 씻고 공방 한쪽에서 기자에게 원두커피를 내려주었다. 고운 얼굴에 가녀린 체구. 그러나 손은 투박했고,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공방에서 꿈을 키우는 사람들
공방에는 중년 여성 수강생 4명이 한창 도예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각자 흙을 조물조물 만져 형태를 만들거나 손 물레를 돌리거나 사포질을 했다. 커피향이 은은히 퍼졌다. 재즈 피아노곡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고 씨가 돈을 벌려고 수강생을 받는 것은 아니다. “혼자 작업하면 나태해질 수 있지만 회원들과 함께하면 좀더 부지런히 즐겁게 작업할 수 있어요. 서로 배울 점도 많고요. 여기서 같이 점심을 해먹는데, 아침에 와서 오후 1시 반이 되도록 다들 배고픈 줄도 모르고 흙을 만지고 있을 때도 많지요.”
공방에 오는 사람들의 나이는 초등학생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직업도 주부, 의사, 교사, 물리치료사, 대학생 등 천차만별이다. 환갑이 넘은 회원은 손자들 국그릇 밥그릇을 만드느라 열심이고, 카페 개업을 준비 중인 바리스타 회원은 커피 잔과 드리퍼를 손수 만든다. 50대 치과의사 회원은 환자의 치아를 치료하느라 뻐근해진 어깨가 흙을 만지면서 낫는다고 했다. 대부분 취미로 도예를 하고 싶어 찾아왔다가 그 매력에 빠져 평생 도예를 할 궁리를 한다.
“마흔 살이 넘어 도예를 시작한 주부 회원도 과거의 저처럼 공방을 차릴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마흔 살. 전혀 늦지 않은 나이죠. 앞으로 40년은 더 살 테니까요.”
도예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 그리고 도예가로서의 자신을 믿고 지원해 주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 고 씨가 지금 행복한 이유다.
“제가 새로운 길을 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 남편이죠. 남편은 언제나 제 편이고 의논 상대이자 응원자예요. 기혼자로서 배우자의 지지 없이는 제2의 인생을 개척할 수 없다고 봐요.”
수많은 주부들이 아이들과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살림하느라 녹초가 된다. 가슴속에 담아뒀던 꿈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차마 꺼내 보지도 못한다. 이런 꿈이 사치일까.
평범한 주부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꿈이 가슴속에서 그윽하게 발효될수록 그 향이 더욱 진해진다는 사실…. 고 씨의 도전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아닐까.
▼ 도예에 입문하려면 ▼
■ 백화점 문화센터나 사설 공방 노크하면 컵-접시부터 연습
도예에 도전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예가 고경원 씨는 “일단 가까운 도예 공방이나 문화센터에 가서 흙냄새부터 맡아 보라”고 조언한다.
잘 찾아보면 시내든 교외든 크고 작은 공방이 많다. 백화점 문화센터에도 도예 강좌가 많다. 문화센터 강좌의 경우 주 1회 2시간씩 수업할 경우 1학기(3개월)에 6만∼10만 원 선이며 재료비와 소성비(가마에 굽는 비용)는 별도다. 보다 전문적이고 학문적으로 도예를 배우고 싶다면 대학 부설 평생교육원을 찾아가면 된다. 학비는 강좌에 따라 1학기에 20만∼150만 원대로 다양하며, 학위 취득을 위한 학점은행제로도 수강할 수 있다.
초보자는 △흙을 가래떡처럼 길게 빚어 쌓아가며 형태를 만드는 ‘코일링(coiling)’ △손 위에서 흙덩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흙을 펴 나가며 형태를 만드는 ‘핀칭(pinching)’ △밀대나 판 성형기로 흙판을 만들어 각진 기물을 만드는 ‘판 성형’ △전기나 발로 물레를 돌려가며 형태를 빚는 ‘물레’ △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속의 흙을 파내는 ‘속 파기’ 등 기본 기술부터 배운다.
주로 일상생활에서 쓰는 컵, 접시, 공기 등 그릇 종류나 간단한 인형, 동물 장식부터 만든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이면 커다란 꽃병, 다기 세트, 커피 드리퍼, 수납함, 조형물 등을 만든다.
고 씨는 “도예가를 꿈꾸더라도 다니던 직장을 무작정 그만두고 전업을 준비하는 것은 반대한다”며 “직장을 다니면서 짬짬이 도예를 접하고 점점 시간을 늘려가는 식으로 해야 좌절과 실패를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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