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9시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앞. 인도에 줄지어 세워진 20여 채의 노란색 천막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날이 어두워진 뒤에만 열리는 해외 유명 브랜드의 ‘짝퉁’ 시장이다. 노점상들이 샤넬, 구치, 프라다, 루이뷔통 등 브랜드를 단 가짜 가방과 지갑을 진열하자 토요일 밤 짝퉁 쇼핑에 나선 인파가 몰렸다.
○ 짝퉁 노점상의 ‘운수 나쁜 날’
붐비는 짝퉁 시장 한가운데에서 한 노점상이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가장 늦게까지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정품가가 수천만 원인 최고가 해외 유명 브랜드 남성용 시계의 짝퉁만 전문적으로 파는 노점상 A 씨(40)였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다른 노점이 단속되지 않는지 계속 살피고 있었다. 같은 짝퉁이라도 가방 지갑과 달리 시계는 국내에 생산 라인이 없어 단가가 배 가까이 비싸다. 압수됐을 때 손실이 더 크다.
1시간가량 주변을 살피던 A 씨는 마침내 오후 10시경 시계를 진열했다. A 씨가 내놓은 짝퉁 시계에 남성 손님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A 씨가 내놓은 시계는 ‘피아제’(정품가 1억2800만 원), ‘윌리스나르댕’(8600만 원), ‘로제뒤뷔’(8000만 원), ‘위블로’(4000만 원) 등 최고가 브랜드의 짝퉁이었다. 특히 ‘파테크필리프’(4500만 원)는 소량 생산 원칙 때문에 ‘아무나 볼 수 없는 시계’라는 별칭까지 달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에서 열린 정품 전시회엔 초우량고객(VVIP) 20명만 초청됐다. A 씨는 신바람을 내며 손님들을 맞이했다. ○ 특별 단속반 “너만 기다렸다”
“시계가 널렸어요. 지금입니다.” 같은 시간 모자를 눌러쓰고 멀찍이서 A 씨를 지켜보던 한 정보원이 짝퉁 단속반에 전화를 걸었다. 특허청 소속 특별사법경찰 수사관 4명은 이날 오후 8시부터 동대문시장 인근 골목에 차창을 짙게 틴팅(선팅)한 승합차를 대고 A 씨를 덮치기 위한 작전을 짜고 있었다. 1개월 전 제보를 받은 뒤 A 씨의 차량과 영업시간 등을 추적한 끝에 이날을 디데이로 잡았다.
수사관들은 카카오톡으로 공유한 A 씨의 얼굴 사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A 씨의 노점을 향해 재빨리 차를 몰았다. 일부 노점상이 단속차량의 번호를 기억하기 때문에 속전속결해야 한다.
손님인 척 슬그머니 접근한 수사관은 순식간에 A 씨에게 수갑을 채운 뒤 주머니를 뒤져 차 열쇠부터 압수했다. 시계 노점상들은 단속에 걸리면 짝퉁 시계를 보관한 차를 압수당하지 않기 위해 열쇠를 내던지고 ‘차가 없다’며 발뺌하기 십상이다. 단속반이 들이닥치자 시계를 구경하던 한 20대 남성 손님은 짝퉁 구매만으론 처벌을 받지 않는데도 당황한 나머지 자신의 휴대전화를 놓아둔 채 달아났다.
특허청에 따르면 이날 A 씨가 팔기 위해 보관했던 시계는 24종 180여 개에 달했다. 만약 정품이었다면 총 52억2900만 원어치에 달한다. A 씨는 중국 제조공장에서 생산돼 밀수입된 이 시계들을 개당 12만∼15만 원에 하루 평균 15개가량 팔아 월 6000만 원이 넘는 매출을 올린 것으로 조사됐다. 특허청 서울사무소는 상표법 위반 혐의로 A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A 씨는 지난해 11월에도 짝퉁 시계를 팔다가 적발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처지다.
○ 짝퉁 시계에 열광하는 이유
최고가 브랜드의 짝퉁 시계에 열광하는 주 고객은 20, 30대 남성이다. 전문가들은 일부 젊은 남성의 짝퉁 소비 뒤에 ‘돈 없어도 저가 제품은 안 쓴다’는 심리가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상대적으로 수입이 적은 젊은 남성들도 연간 명품 구입비가 1억 원 이상인 사람들만 사는 ‘위버 럭셔리(Uber Luxury·명품 위의 명품)’를 선호하다 보니 짝퉁에 눈을 돌렸다는 설명이다. 이장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2000년대 중반 주식시장 활황으로 중년 남성 사이에 불었던 해외 유명 브랜드 시계 열풍이 젊은층으로 확산되면서 짝퉁 시계 시장이 더 활발해졌다”고 분석했다.
남성용 시계는 여성용 가방 지갑과 달리 연령별 취향 차이가 크지 않고, 정계 재계 일각에서 로비용으로 사용되는 사례가 생기면서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고가품’이라는 식의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날 A 씨가 체포되는 순간 불을 전부 껐던 동대문 짝퉁 시장 노점상은 단속반이 사라지자 금세 다시 활기를 찾았다. 다른 짝퉁 시계 노점상은 기자에게 “일주일만 벌면 벌금을 두세 번은 메울 수 있는데 장사를 쉴 수 있겠냐”고 말했다. 짝퉁 판매의 경우 벌금이 처음 걸리면 200만 원, 두 번째는 500만∼700만 원 정도 된다. 죄질이 나쁘면 첫 적발에도 실형이 선고될 수 있다.
이동걸 특허청 서울사무소장은 “인력 부족으로 많은 짝퉁 판매업자를 한꺼번에 단속하기 어려워 행태가 심한 업자를 찍어서 단속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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