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른 길은 사람과 가깝다. 사람에게는 자기 나라 남의 나라가 따로 없다(夫道不遠人, 人無異國).”
9세기 ‘신라 청년’ 고운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관직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와 남긴 말 가운데 한 마디다. 지금 음미해도 사람에 대한 존엄성과 주체성, 국경을 초월한 보편성에 대한 깊은 울림이 느껴진다. 최치원은 지금의 초등 5학년 쯤인 12세 때 배를 타고 당나라 유학 길에 올랐다.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아들이 아니다. 오직 공부에 힘써라!” 고운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같이 당부했다.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 편)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10년 동안 당나라의 중요한 관직을 맡아 활동했던 고운은 28세에 신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신라를 개혁하려던 그의 꿈은 펼쳐지지 못했다. 삼국사기는 “당나라 유학에서 배운 것이 많다고 생각하여 신라에서 뜻한 바를 실천하려고 했으나 말세에 그를 의심하고 꺼리는 자가 많아 수용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 인무이국 경북 정신
고운의 꿈은 좌절됐지만 그의 ‘인무이국(人無異國)’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배움과 진리를 향한 열정은 나라(국가)의 경계나 칸막이를 넘어서 있다. 고운의 사상을 유교 불교 도교를 융합한 ‘오묘한 풍류도’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의 풍류(風流)는 국경을 넘어 문화적 보편성을 추구한 유연한 사고이다. 당나라 때 국제무역이 활발했던 장쑤(江蘇) 성 양저우(揚州) 시가 2001년부터 최치원 기념행사를 열고 2007년에는 최치원 기념관을 건립한 이유도 이런 배경이리라. 경북 경주 출신인 고운의 삶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의 국제적 안목과 식견은 당시 신라에서 활용되지 못했지만 그의 삶을 밑거름으로 형성된 ‘경북 정신’은 1000여 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열매를 꿈꾸며 싹을 틔우고 있다.
‘형제의 나라’ 터키에서 열리는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8월 31일∼9월 22일)는 ‘인무이국’ 정신의 한가지 실현이다. 경북도와 경주시, 이스탄불 시가 함께 펼치는 이번 엑스포에는 50개국 문화예술인 1만여 명이 참가한다. 동양과 서양의 문명이 어우러지는 융합의 땅 이스탄불은 이번 엑스포로 새로운 ‘인무이국 문화 이정표’로 주목 받을 것이다. 엑스포의 주제인 ‘길, 만남, 그리고 동행’은 동서양이 서로 다가가 만나고 새로운 문화의 지평을 함께 열어젖히는 길(道)이다.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인구 1300만 명의 이스탄불(비잔티움 또는 콘스탄티노플로 불렸음)이 인구 23만의 경북 경주시와 문화를 주제로 엑스포를 공동 개최하는 것은 문명사적 뜻이 있다. 명실상부 ‘지구촌 문화수도’인 이스탄불은 외형적으로는 경주와 비교하기 어렵다. 나폴레옹이 “만약 지구에 하나의 나라가 있다면 수도는 당연히 이스탄불이 돼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경북도가 이 엑스포를 시도했을 때 이스탄불의 첫 반응은 “서울이라면 모를까…”였다.
이스탄불 총영사 출신인 홍종경 경북도 국제관계대사는 “공동 개최라는 사실만으로 이미 절반의 성공”이라며 “두 도시의 외형적 규모나 브랜드를 넘어 ‘문화’를 가교로 엑스포 공동 개최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올해 1월 공동조직위원회 출범 때 카디르 톱바쉬 이스탄불 시장(공동조직위원장)은 “세계 최대의 관광지인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이번 엑스포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도록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경북도가 이스탄불 엑스포를 앞두고 경주∼이스탄불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비단길, 고대 교역로)를 한 걸음 한 걸음 딛는 ‘대한민국 경북도 실크로드 탐험’을 진행하는 이유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탐험대원(대장 윤명철 동국대 교수) 80여 명은 올해 3월 경주에서 중국 산시(陝西) 성 시안(西安)까지 탐험한 데 이어 7월부터 엑스포 개막일까지는 시안∼이스탄불 구간을 탐험한다. 경주에서 이스탄불까지는 1만7000여 km이다.
경북 정체성의 저력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와 실크로드 탐험 같은 ‘인무이국’을 실천하는 에너지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당나라를 거쳐 인도와 아랍까지 살펴본 뒤 불후의 명작 ‘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인 혜초, 소말리아 아덴 만의 해적을 물리치는 청해부대의 선구자 신라인 해상왕 장보고(청해부대 이름은 장보고가 전남 완도에 설치한 청해진에서 따왔으며 해적이 없는 깨끗한 바다라는 뜻), 신라인의 정신을 잘 보여준 최치원으로 이어지는 어떤 정신이 면면히 흐르지 않는다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경북도는 2006년부터 ‘경북 정신’을 나타내는 ‘경북 정체성(正體性·바른 모습)’ 문제를 고민했다. 신라에서 현대까지 경북에 흐르는 정신(얼, 혼)의 바른 모습을 찾고 지역과 국가를 발전시키는 에너지로 만들겠다는 의지다. 이는 인무이국 정신을 계승해 어제와 오늘, 내일을 비추고 이끄는 거울로 삼으려는 뜻이기도 하다. ‘뿌리’를 확인해서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려는 개방적이고 진지한 노력이다. 지역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전통 속에서 발굴해 빛이 나도록 다듬는 과정이다.
6년 동안 거듭된 고민 끝에 찾은 네 가지 경북 정신은 △화랑 △선비 △호국 △새마을 정신. 신라 삼국통일의 원동력을 발휘한 화랑,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음을 실천한 선비, 의병과 항일독립에 앞장선 호국, 가난의 고리를 끊어낸 새마을운동에 주목했다. 각계 전문가 60여 명은 2011년 이 네 가지 정신을 경북을 상징하는 정체성으로 삼고 이를 관통하는 DNA(유전자)를 찾고 있다. 내년 하반기 안동으로 이전하는 경북도청 신청사 시대에 맞춰 확정 발표할 계획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정신
이 같은 경북 정신의 재조명은 경북만을 위한 자부심이나 자화자찬이 목적이 아니다. 정신적 가치를 계승해 오늘과 내일을 넓게 펼치는 기반으로, 새로운 사회적 자본으로 만들려는 뜻이 놓여 있다. 변화를 꺼리는 갑갑한 지역이 아니라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진정한 보수적 고장으로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겠다는 의지다.
보수(保守)는 맹목적 지킴이 아니라 ‘도와서 기르며 바르게 지킨다’는 뜻이다. ‘보(保)’는 ‘돕다’ ‘기르다’ ‘양육하다’라는 의미. 화랑-선비-호국-새마을은 모두 ‘서로 도와 키운다’는 공통점이 있다. 화랑은 남북통일의 힘으로, 선비는 사회의 부조리와 갈등을 치유하는 힘으로, 호국은 국력을 키우는 저력으로, 새마을운동은 지구촌 잘살기 모델로 성장하고 있다. 독도 지킴에 경북이 늘 앞장서는 이유도 행정구역이 경북 울릉군 독도리라는 이유를 넘어 화랑 선비 호국 새마을 정신에 닿아 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전국시도지사협의회장)는 “지역이든 나라든 ‘한번 신나게 해보자’는 분위기가 굉장히 중요하다. 어디서 그런 힘을 찾을 수 있는가. 전통을 잘 살펴서 새로운 에너지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혈관이 연결돼 흐르는 맥락(脈絡)이 끊어지면 생기발랄한 에너지가 나올 바탕을 찾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전통을 잘 발효시켜 새로움을 창조한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널리 통하는 모범을 이룰 수 있다’는 온고지신의 철학이 경북의 독도와 영일만 호미곶, 서라벌 토함산에서 일출(日出)처럼 솟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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