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선비-호국-새마을’이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이미 유통기간이 지나버린, 시대와 어울리지 않게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기 쉽다. 경북이 이 네 가지를 온고(溫故) 즉 발효시켜, 지신(知新) 즉 미래를 여는 새로운 나침반으로 만들기 위한 힘을 모으는 이유는 이 같은 정신 속에 오늘을 비추고 내일을 밝히는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라 화랑의 정신인 풍류(風流)는 물 흐르듯 소통하는 분위기와 신바람 한류(韓流)의 바탕이 될 수 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선비정신은 개인과 사회가 스스로 돌아보면서 바른 길을 가도록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항일 의병과 독립운동으로 상징되는 호국 정신은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든든한 울타리다. 보릿고개를 이겨낸 새마을운동은 이제 지구촌의 가난을 몰아내는 새로운 잘살기 모델로 확산되고 있다. 이들 정신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고 미래형이다.
소통과 융합, 화랑 풍류정신
신라 화랑의 수련 프로그램과 정신을 초중고교 교육에 도입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학교 폭력 같은 올바르지 못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우정과 화합으로 기상을 키우는 토양이 형성되지 않을까?
화랑정신은 이를 위해서도 효과적인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화랑은 기본적으로 청소년 수련단체여서 더욱 그렇다. 화랑을 양성하는 교육프로그램은 개인의 자질을 전면적으로 발휘하도록 하는 ‘전인(全人)’ 교육을 철저히 추구했다. 이런 점에서 화랑은 지금 학교 교육이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전인교육의 모델로서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화랑정신의 핵심인 ‘풍류(風流)’는 청소년뿐 아니라 모든 세대가 귀 기울일 만한 멋진 측면이 있다. 최치원이 풍류를 가리켜 ‘현묘한 이치’라고 규정한 것은 깊은 뜻이 들어있다. 이는 유교 불교 도교를 단순히 종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높은 차원을 추구한다. ‘현(玄)’은 ‘깊고 크고 통달한다’는 뜻이고, ‘묘(妙)’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빼어나고 훌륭하다’는 뜻이다. 품격있고 아름다우며 운치있는 멋스러움이 바로 풍류이다.
화랑은 이 같은 풍류를 생활 속에서 실천했다. 당시 화랑의 활동무대는 경주 서라벌에 한정되지 않고 전국 곳곳을 다니며 심신을 수련했다. 그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정체성을 찾고 협동하는 자세를 배우며 공동체를 생각하는 정신이 몸에 배도록 했다. 좁은 공간에 모여 주입식 교육을 받는 방식이 아니었다. 풍류는 그저 노는 게 아니다. ‘풍(風)’은 기운차게 뻗어나가는 모습이고, ‘류(流)’는 물처럼 흘러 널리 퍼지는 모습이다. 풍류는 몸에 신바람을 일으키는 에너지였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화랑이 돋보이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바탕도 풍류에 바탕한 신바람에서 가능했다. 호연지기를 바탕으로 성장한 기개가 없었다면 삼국통일에 앞장서는 기개를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화랑이 우리나라(조선)를 우리나라답게 만들었다. 화랑을 모르고 우리 역사를 말하려는 것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배경 아니었을까?
화랑의 풍류정신은 청소년을 넘어 신라를 개방적이고 진취적으로 만든 토대가 됐다. 경주 출신으로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人乃天)”을 주창하며 동학(東學)을 열었던 수운 최제우의 사상도 기운차게 뻗어나가는 풍류정신이 없었다면 나오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모죽지랑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도솔가’ ‘제망매가’ 같은 많은 향가(鄕歌)가 화랑의 작품이라는 점은 그들의 풍성한 심성을 느끼게 해준다.
8세기 서라벌(경주) 인구가 90만 명에 달했던 사실은 신라 사회가 얼마나 역동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당시 당나라 수도 장안(시안)과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인구가 100만 명가량이었음을 감안하면 풍류 정신이 넘친 신라가 국제도시로 우뚝 섰음을 짐작하게 한다. 실제 당시 신라에는 이슬람권과도 문물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경북이 터키 이스탄불과 문화를 주제로 엑스포를 개최하고 경주에서 시안을 거쳐 이스탄불에 이르는 실크로드 대탐험에 나서는 뿌리도 신라 풍류정신에 닿아 있다. 풍류정신은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선비정신과 멀지 않다.
의리와 올바름, 선비정신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는 해마다 6만∼8만 명의 청소년과 기업인, 공무원 등이 찾는다. 선비정신을 주제로 연수를 시작하던 2002년에는 200여 명 수준이던 연수생이 10년 만에 300배 이상 크게 늘었다. 선비정신의 사회적 가치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특히 기업의 참여가 해마나 눈에 띄게 늘어난다. 윤리적 기업 경영의 바탕을 선비정신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경북이 선비정신을 사회교육 프로그램으로 마련한 때는 2001년. 퇴계 이황 탄신 500주년에 맞춰 추진했다.
선비정신은 경북만의 전통은 아니지만 경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소수서원이 있는 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고려 말 안향(1243∼1306)이 중국의 성리유학을 소개하면서 조선시대 유학이 피어나는 토양이 비로소 마련됐기 때문이다. 그 뿌리 또한 신라에 닿아 있다. “내 비록 계림(신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다”는 신라 신하 박제상,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를 올려 과감한 개혁을 주장한 최치원, 최치원의 정신을 이어 고려 성종 때 시무 28조를 임금에게 올려 개혁을 주장한 경주 출신의 문신 최승로 같은 인물은 선비정신의 선구자였다.
선비정신은 공동체의 건전한 발전을 꾀하려는 유학의 정신과 뗄 수 없다. 안향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유학은 경주 출신의 이제현으로, 다시 영덕 출신의 목은 이색을 거쳐 영천 출신의 포은 정몽주로 이어진다. 구미 출신의 야은 길재는 포은의 제자이다. 목은 포은 야은의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 정신은 조선시대로 면면히 이어졌다. 유서 깊은 이 학맥은 충절과 의리를 중시하는 선비정신을 싹틔웠다. 경북 봉화 출신인 정도전은 조선 왕조의 방향을 집대성한 경국대전을 편찬했다.
16세기 들어 퇴계 이황이 유학의 정수를 이룩하고 사심 없는 삶을 통해 선비정신을 명경지수처럼 보여주기까지 많은 선각자들의 디딤돌이 놓여 있었다. 퇴계의 후손인 이육사가 ‘광야에서’ 같은 저항 시(詩)로 항일운동을 펼친 일도 우연일 수 없다. 임진왜란 때 권율과 이순신 장군을 발탁한 서애 류성룡, 임진왜란 공신 학봉 김성일의 후손 중에 독립운동가가 대거 배출된 배경에도 서애와 학봉의 스승인 퇴계의 곧은 삶이 영향을 미쳤다.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 ‘경주 최부자’는 선비정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500년 12대를 이어온 부자였지만 재산이 많은 부자에 그친 게 아니라 ‘나눔’의 실천으로 진정한 부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베풀고 나라가 어려웠을 때는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했다. 동학농민운동 등 사리사욕에 눈이 먼 부자들은 습격이 대상이 됐지만 경주 최부자는 그렇지 않았다. 윤리적이고 근검절약을 통한 정당한 부(富)의 축적은 최근 기업가들의 연구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경북에 면면히 흐르는 이 같은 선비정신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사사로움을 이겨내고 공동체 유지 발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호국정신으로 나타난다. 진정한 선비는 책상 앞에 앉아 문헌이나 뒤적이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삶, 호국정신
항일의병이 처음 일어난 곳은 어딜까?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이 있는 경북 안동에 대한 첫인상이 형식적인 체면을 중시하는 고리타분한 지역으로 다가온다면 이는 편견이다. 최초의 항일의병인 갑오의병(1894년)을 일으킨 곳이 바로 안동이다. 의병은 항일독립운동의 발단이라는 점에서 안동은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다. 유학자를 중심으로 촉발된 의병활동은 영덕의 신돌석처럼 평민들의 호국정신에도 불을 붙였다.
지난해 기준으로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1만 3000여 명 가운데 경북 사람이 2016명으로 가장 많다. 가장 강렬한 항일투쟁 방식인 자결도 독립유공자로 확인된 61명 가운데 17명이 경북으로 가장 많다.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세우는 데 핵심 역할을 한 김동삼과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은 이상룡 등 경북 출신 독립운동가의 역할은 매우 두드러졌다. 독립운동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경북 영양 출신인 남자현은 ‘여자 안중근’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린다. 손가락을 잘라 항일독립의 의지를 보여 뭇 남자들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경북 안동에 독립운동기념관이 설립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의병과 독립운동을 보면 경북 정신은 과격하고 격정적 측면이 적지 않다. 특히 안동은 독립유공자가 348명으로 전국 기초지자체 가운데 가장 많다. 이 아이로니컬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유학의 혁신적 바탕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렵다.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면 이쪽저쪽 눈치를 보지 않고 목숨까지 기꺼이 버리면서까지 결단을 내리는 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는 “몸을 사리는 태도는 유학의 본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공동체가 살아온 모습인 전통을 지켜내려는 절실한 계승의식에는 강력한 투쟁성이 잠재돼 있다. 외세의 침략이라는 절박한 위기상황과 마주할 경우 유학은 모든 것을 던지는 혁신적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은 6·25전쟁 때 낙동강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저력으로 이어졌다. 바람 앞의 등불 같던 위기 상황에서 최대 격전지가 칠곡 영천 포항 등 경북의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졌다. 왜관 다부동과 기계 안강 지역, 영덕 포항 지역에서 벌어진 20여 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도 비로소 가능했다. 학도의용군 지원과 피란민 보호에도 경북이 앞장섰다. 이 전통은 화랑에서 시작해 선비정신으로 이어진 ‘올곧은’ 정신의 힘이다. 독도 수호에 경북이 늘 앞장 서는 이유도 이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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