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동 ‘팅커벨’ 습격 사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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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 해질녘이면 새까맣게 벌레떼로 뒤덮여

19일 오후 3시경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가구 매장 쇼윈도에 빼곡하게 달라붙어 있는 ‘압구정 벌레’. 놀란 행인들의 모습이 유리창에 비치고 있다. 우용구 씨 제공
19일 오후 3시경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가구 매장 쇼윈도에 빼곡하게 달라붙어 있는 ‘압구정 벌레’. 놀란 행인들의 모습이 유리창에 비치고 있다. 우용구 씨 제공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와 청담동 명품거리가 날벌레떼의 ‘공습’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이달 중순부터 해질녘이면 연한 녹갈색의 날벌레가 떼 지어 날아와 화려한 조명을 뽐내는 쇼윈도에 다닥다닥 달라붙는다. 거리를 걷던 여성들은 때론 하늘을 뒤덮을 듯이 날아다니는 벌레들에 놀라 기겁을 하고 실내로 피하곤 한다. 이 일대에서는 ‘팅커벨’(피터팬에 나오는 요정 이름) ‘압구정 벌레’로 불리는 날벌레들은 4, 5년 전부터 해마다 5월 중순이면 날아와 한 달가량 기승을 부린다. 큰 것은 어른 새끼손가락만 하고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의 몸통에 검정과 흰 줄무늬의 더듬이와 기다란 꼬리가 있다.

심할 때는 아예 유리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는다. 일부 여성은 벌레가 몸에 달라붙어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상인들은 전기 파리채로 태우고 빗자루로 쓸어 내거나 바가지로 물도 부어 보지만 쉬지 않고 밀려드는 벌레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로데오거리에서 16년째 안경점을 운영하는 김기열 씨(37)는 18일엔 아예 오후 8시에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김 씨는 “해가 지자 벌레들이 아예 쇼윈도를 뒤덮어 버렸다. 흡사 초록빛 커튼을 쳐 놓은 듯한 모양새였다”며 “가게로 들어오려던 손님들이 비명을 지르고 달아나니 일찍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인근 아파트 주민 최모 씨(25·여)는 “비 오기 전후에 더 심해진다. 한번은 해질녘에 벌레들이 이 거리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는 걸 봤는데 마치 영화 ‘미이라’의 한 장면 같았다”고 말했다. 심한 날에는 압구정 지하철역 구내까지 밀려들어 온다는 게 주민들의 말이다.

대형 의류 매장과 고급 상점이 밀집한 구역인 만큼 매출 피해도 크다. ‘이니스프리’ 화장품 매장 종업원 임모 씨(24·여)는 “일단 벌레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매출이 거의 없다. 손님이 3시간에 한 명 들어올까 말까 하고 그마저도 문에 붙은 벌레들 때문에 망설이는 손님이 있으면 우리가 얼른 가서 열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강남구청 보건과에 따르면 이 벌레는 ‘동양하루살이’다. 2급수 이상의 물이 있는 곳에 주로 서식한다. 외관상 혐오감을 주는 것 외에는 사람을 물어 균을 옮기는 등의 직접적인 피해는 주지 않는다. 과거엔 한강 상류에서만 서식했지만 수질이 개선되면서 지류로까지 활동 범위를 넓힌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구청 보건과에서 오전과 오후 두 차례 현장 점검과 방제 작업을 하고 있지만 미봉책 수준이다. 이종혁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환경과 과장은 “해마다 이 벌레를 잡아 달라는 민원이 밀려들고 있지만 한강변은 상수원보호구역이자 생태보전지역이라 사실상 살충제를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경기 남양주 여주 양평 등 강변의 수질이 개선된 수도권에서도 동양하루살이가 떼로 출현해 불편을 준다는 신고가 접수되지만 이들 지역 역시 방제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은 “서식지에 천적을 풀어 유충을 잡아먹게 하거나, 강한 빛으로 성충을 모아 퇴치하는 등 사람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대책을 만들어야 할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배연재 고려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압구정 로데오거리 근처에는 성수대교 남단 녹지대 등 서식처가 밀집돼 있다. 이곳에서 대량 번식한 동양하루살이가 불빛을 따르는 습성으로 인해 해질녘부터 빛이 강한 로데오거리로 몰려드는 것으로 보인다”며 “동양하루살이가 많이 보일수록 환경이 그만큼 개선되고 있다는 증거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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