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만 걸친 男… 목줄 풀린 개… 공포에 떠는 女 방문노동자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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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대 수도검침원 참변으로 본 ‘위험천만 근무환경’

수도검침원 김모 씨(52·여)는 9일 오후 수도계량기를 확인하러 홀로 경북 의성군 봉양면 손모 씨(31) 집을 찾았다. 과거에도 김 씨는 손 씨 집 마당에 설치된 수도계량기를 확인하고 돌아가곤 했다. 이날 집 안에 있던 손 씨는 김 씨가 검침하는 소리를 듣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러곤 “욕실에 물이 새는 곳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후 열흘째인 18일 김 씨는 인근에서 알몸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공무원인 남편과 세 아이를 둔 김 씨는 생활비와 자녀 대학 학비를 마련하려고 수도검침원 일을 시작했다. 사건 당일엔 아내의 일을 돕겠다고 하루 휴가를 낸 남편과 봉양면에 왔다. 담당구역이 넓어 남편과 따로 각 가정을 방문하다가 변을 당했다. 경찰은 손 씨가 김 씨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것으로 보고 있다.

24일 검거된 손 씨는 경찰에 “김 씨가 집으로 들어오면서 휴대전화를 꺼내기에 경찰에 신고하는 줄 알고 죽였다”며 “성폭행했는지, 인근 야산에 어떻게 유기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손 씨는 우울증 등으로 병원 치료를 받은 전력이 있다. 그는 부모 집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혼자 살았다.

○ ‘나쁜 손’에 떠는 여성 방문근로자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여가 늘어나면서 수도검침원뿐 아니라 가스검침원, 정수기 렌털업체 직원 등 고객의 집을 직접 방문해 일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여성이 급증하고 있다. 업체들도 여성의 임금이 싼 데다 남자 직원이 방문하면 여성 고객이 문을 열어 주길 꺼리는 경우가 많아 여성 직원을 선호한다. 한 대형 정수기·비데 렌털업체의 방문 직원 1만3500여 명 중 85%가 여성이며, 수도권의 한 도시가스업체 검침원의 75% 이상이 여성이다. 대부분 40, 50대 주부인 이들은 적은 월급이지만 생활비, 자녀 교육비에 보태려고 억척스럽게 일하는 우리네 ‘어머니’들이다.

그러나 경북 의성에서 살해된 김 씨 사건이 보여 주듯 홀로 남의 집을 방문해야 하는 여성 방문 근로자들은 예기치 않은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어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2011년 A 씨(55·여)는 자녀 대학 학비를 마련하려고 가스검침원 일을 시작했다. A 씨는 고객의 집에 들어가 가스검침을 하는 데 걸리는 ‘5분’이 세상에서 가장 길게 느껴진다고 했다. 특히 집 안에서 여자나 어린아이 목소리 대신 남자 목소리만 들리면 더 불안하다. A 씨는 “혼자든 여럿이든 남성만 있으면 겨울에도 팬티만 입고 문을 열어 주는 일이 흔하다”며 “야한 농담을 건네고, 차 한잔하고 가라며 붙잡고, 뒤에 서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사람도 있다”고 토로했다.

정수기 렌털업체 직원 B 씨(45·여)도 남자 고객의 성희롱이 고민이다. B 씨는 “70대 노인이 ‘딸 같다’며 자꾸 어깨를 주무르고 안으려고 해 피하다가 나중엔 나보다 나이 많은 동료에게 점검을 부탁했었다”며 “그 노인은 대신 간 동료의 가슴을 무턱대고 만지더니 ‘딸 나이라 그런 거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고 전했다.

황당한 사고를 당해도 참아야 한다. 정수기 렌털업체 직원 C 씨(53·여)는 지난해 11월 고객이 기르던 애견에게 종아리를 물렸다. 주인은 사과는커녕 “사람을 절대 물지 않는 강아지인데 왜 당신만 물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C 씨는 “우리는 고객이 본사에 불만 접수를 하면 평가점수가 깎이고 예절교육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성희롱 등 각종 횡포도 참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정신질환 남자에게 위협을 당해 혼비백산 도망친 사례도 있다.

○ 범죄 예방 대책은 메모지?

불안에 떠는 여성 방문노동자들은 각자 노하우를 공유하며 범죄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가스검침원 이모 씨(51·여)는 집 주인의 양해를 구하고 현관문을 열어 둔 채 집 안에 들어간다. 이 씨는 “겨울엔 춥다고 문을 못 열게 하거나 일부러 문을 갑자기 닫아 버리는 남자가 많아 별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일부 검침원은 평소 행실이 나쁜 남자가 있는 집을 메모지에 적어 동료와 돌려 읽기도 한다. 또 방문하기 전에 집으로 전화를 걸어 여성이나 어린이가 있는지 확인하고 찾기도 한다.

업체들은 방문노동자 안전 대책엔 손을 놓고 있다. 한 도시가스업체 관계자는 “가정을 방문했을 때 범죄 피하는 방법을 따로 교육하지 않는다”며 “다만 피해를 본 검침원이 있으면 다음 번 방문엔 남자 검침원을 보내는 등 지사별로 해결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 렌털업체 관계자는 “인적이 드문 곳이나 유흥가엔 남자 직원을 보낸다”며 “두 달마다 가정을 방문해 충분한 신뢰를 쌓기 때문에 위험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남성만 있는 공간에 여성 검침원이 홀로 방문하면 충동 범죄가 일어날 위험성이 높다”며 “가급적 2인 1조로 검침하도록 하는 등 최소한의 안전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훈상·김성모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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