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소 여성을 배려하던 신사도 유독 도로에 나서면 여성 운전자를 향해 거칠게 경적을 울려 대는 난폭 운전자로 돌변하곤 하죠. 여성 운전자 1100만 시대지만 여성은 여전히 도로에서 위협받고 무시당하는 게 현실입니다. 동아일보-채널A 연중기획 ‘시동 꺼! 반칙운전’은 4부에서 여성 운전자를 주제로 다룹니다. 첫 회에서는 여기자가 여성 교통경찰과 함께 도로로 나섰습니다. 여기자도 화가 났다고 하네요. 만화 속 여성처럼 배트맨 영화의 천하무적 배트카라도 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하더군요. 우리 아내와 딸들이 즐겁게 운전할 수 있는 도로가 됐으면 합니다. 남성 운전자 여러분, 도로 위의 신사가 진정한 페미니스트랍니다! 》
도로 위에도 여성시대가 열리는 듯하다. 지난해 경찰청에 등록된 여성 운전면허 소지자 수 1133만60명만 보면 그렇다. 전체 운전면허 소지자 2826만3317명 중 40.1%에 해당하는 수치다. 하지만 나머지 60%를 차지하는 남성 운전자에게 위협을 느끼는 여성 운전자가 적지 않다. 창문을 내리고 째려보거나 욕설까지 퍼붓는 남성 운전자에게 시달리는 게 여성 운전자가 겪는 도로 위의 현실이다.
도로 위의 이런 분위기는 여성 운전자를 위축시키고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여성 운전자는 화가 나지만 도로 위에서 마땅한 대응 수단이 없어 냉가슴만 앓을 뿐이다.
동아일보 ‘시동 꺼! 반칙운전’ 취재팀은 이런 도로 위의 남녀차별 실태를 확인해 여성 운전자의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기 위해 직접 실험에 나섰다. 사복 차림의 남녀 교통경찰이 각각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석에 앉은 서울지방경찰청 교통순찰대 소속 이주은 경사(35·여)와 김용현 경사(38)는 모두 운전경력 15년차 베테랑. 남성 기자는 김 경사의 옆자리에, 여기자는 이 경사의 옆자리에 앉았다.
동일한 차종인 2대의 차량은 16일 오후 1시경 서울 마포구 동교동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사거리에서 출발해 신촌 로터리-광화문 사거리-지하철 4호선 명동역-남산1호 터널-지하철 2호선 강남역을 경유해 서울 서초구 양재동 이마트 양재점까지 총 30.81km를 10분 간격으로 출발했다. 각각 △차로 변경은 여유 있게 △주행속도 지켜 정속 운행 △신호대기 후에는 천천히 출발 등 안전운전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보통의 남성 운전자들이 ‘답답한 여성 운전’이라고 여기는 행동을 한 뒤 반응을 살펴봤다.
○ 여자라면 일단 째려보고 추월
먼저 출발한 이 경사는 시작부터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운전 실력은 뛰어나지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도로에 나설 때마다 살짝 경직된다고 했다. 그녀는 “15년 동안 운전했지만 나도 실수할 때가 가끔 있다”며 “그럴 때마다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째려보며 삿대질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운전할 때 일부러 옆을 안 보고 앞만 보고 달린다”고 말했다.
신촌 로터리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녹색으로 완전히 바뀐 것을 확인하고 서서히 출발하려는 순간 뒤쪽 흰색 싼타페 차량에서 신경질적으로 ‘빵빵’ 경적을 울렸다. 이 경사는 사이드미러를 통해 뒤차의 남성 운전자를 보더니 “아까부터 천천히 간다고 계속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뒤차에서도 앞차의 사이드미러나 룸미러를 통해 살펴보면 앞차 운전자가 여성임을 알 수 있는 탓이다. 같은 시각 동교동 삼거리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김 경사는 녹색 신호로 바뀐 지 3초가 지난 다음 출발했지만 경적 소리 한 번 듣지 않았다.
충정로 삼거리를 지나 서대문 고가도로로 진입하는 도중에도 여성인 이 경사는 뒤따르던 검은색 K5 차량의 경적을 들어야 했다. 선글라스를 낀 중년 남성 운전자는 규정속도를 지키는 이 경사가 답답하다는 듯 위협적으로 경적을 울려댔다. 이 경사는 “늦게 간다고 저러는 것”이라며 “이런 경우 급하게 추월하면서 욕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남성인 김 경사는 이날 주행 도중 앞차와 100m 간격을 두고 달린 적도 있지만 이로 인해 경적을 듣지는 않았다.
시청 앞 서울광장을 지나 회현 사거리에 들어선 이 경사는 2차로에서 지하철 4호선 명동역 방면으로 천천히 좌회전했다. 이때 뒤에 있던 담홍색 택시 한 대가 재빠르게 1차로로 차로를 변경해 이 경사의 차를 추월했다. 추월하면서 창문을 통해 이쪽 운전석을 살피던 택시 운전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봤죠? 방금 (택시 운전사가) 째려보는 거.”
이 경사는 “눈이 마주쳤는데 여자라는 걸 확인하더니 저렇게 째려본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녀는 “남자가 교통법규를 위반하거나 늦게 가면 ‘휴대전화 보며 딴짓을 했나 보다’ 하지만 여자가 그러면 ‘여자니까 그렇지’라고 생각하는 남성 운전자들의 선입견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두 경찰관의 운전에 대한 주변 운전자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수차례 위협적인 시선을 받고 추월당한 이 경사와 달리 김 경사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뀐 후 천천히 출발하거나 끼어드는 차량에 양보하느라 주행을 멈췄을 때 몇 차례 짧은 경적을 들었을 뿐 옆으로 다가와 째려보는 등 위협으로 느낄 만한 상황은 없었다. 경적의 강도도 달랐다. 남자인 김 경사의 차에 대한 경적은 가볍게 울리는 정도였던 데 비해 이 경사에 대해서는 신경질이 가득 묻어나는 길고 반복되는 경적이 이어졌다.
○ 도로 위 ‘여성 무시’ 경험 63.6%
취재팀은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와 함께 여성 운전자 3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들은 운전경력 평균 12년, 1주일에 평균 4.6회 운전을 하는 30, 40대 여성. 운전 중 여성이라고 무시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63.6%가 ‘그렇다’고 답했다. 남성 운전자로부터 욕설을 듣거나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는 응답자도 각각 42.4%, 51.5%였다.
윤정숙 씨(47·여)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 옆 차로로 이동했는데 (상대방 남성이) 갑자기 경적을 울리면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며 추월했다”고 답했다. 윤 씨는 자신이 주차하느라 잠시 기다리게 된 택시 운전사가 그 짧은 시간을 못 참고 “집에서 설거지나 하라”며 욕했던 경험을 가장 불쾌한 기억으로 꼽았다. 연모 씨(36·여)는 “무리한 끼어들기나 얌체운전에 항의해 경적을 울렸더니 상대 남성 운전자가 오히려 창문을 열고 욕을 했다”고 답했다.
○ 도로 위 ‘안전운전 배려’가 해법
전문가들은 도로 위의 여성 차별은 △가부장적 문화 △일부 여성의 운전 미숙에 대한 과민반응 △도로를 사적 공간으로 인식하는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김인석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심리학 박사)은 “여성 운전자들은 위험 감수 성향이 낮아 천천히 주행하는 등 안전운전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답답하게 여기고 난폭운전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도로문화가 문제”라며 “도로를 공적 공간으로 인식해 다른 운전자를 배려하는 ‘로드셰어링(roadsharing)’ 개념을 정착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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