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소규모 학원 영어강사 김모 씨(31·여)는 ‘반드시 의사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김 씨는 한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7명의 의사를 소개받았지만 모두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고 2010년 8번째 만난 사람이 서울 강남지역 대형종합병원 의사 A 씨다. A 씨 집에선 김 씨에게 결혼 지참금으로 12억 원을 요구했다. 의사와 꼭 결혼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김 씨는 중견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졸라 돈을 마련했다. 하지만 2011년 결혼한 부부는 1년여 만에 이혼했다. 12억 원으로 병원을 개업한 남편이 계속해서 병원 투자 비용을 처가에 요구하자 불화가 생긴 것.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 등 소위 ‘사’자 전문직 사위를 맞으려면 아파트, 자가용, 개업사무실 등 ‘열쇠 3개’와 밍크코트, 최고급 예물 등을 준비해야 한다는 그릇된 결혼 예단 문화가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잠잠해지는 듯하더니 최근에는 ‘현금 거래’ 방식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특히 어려운 형편(개천)에서 출세했다는 뜻의 ‘개룡남’을 둔 집에선 단박에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듯 노골적으로 거액의 현금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30대 B 씨는 올해 초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또래 여성 C 씨를 만났다. 명문대를 나와 사법연수원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B 씨는 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진 빚 8억 원을 한번에 해결해줄 수 있는 신붓감을 물색했다. 부모가 B 씨에게 그런 요구를 하라고 은근히 압박했다. 마침내 빚 8억 원을 갚아주고 지참금 3억 원까지 챙겨주는 조건에 응한 C 씨와 올봄 결혼했다.
과거에는 중매를 전문으로 하는 ‘뚜쟁이’가 중간에서 결혼 지참금을 조정했다. 복수의 결혼정보업체에 따르면 과거 뚜쟁이들은 지참금의 일부를 수수료로 받았기 때문에 신랑 쪽엔 ‘더 받으라’, 신부 쪽엔 ‘더 챙겨줘야 한다’고 부추겼지만 신랑 쪽과 신부 쪽이 직접 마주치지는 않아 얼굴 붉힐 일이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정보업체가 자리 잡은 요즘에는 양가가 직접 지참금 액수를 조정하다 보니 분쟁이 더 늘어난다는 게 결혼정보업계의 설명이다. 치과의사 아들을 둔 예비 시어머니가 신부 어머니와 합의해 억대 결혼 지참금을 받고선 이유 없이 결혼을 미루다가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최근 일부 전문직 남성들은 결혼 지참금 요구를 당연시하고 같은 직종의 또래들과 지참금 액수에 대해 상의하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한 의사는 의사만 가입이 가능한 비공개 커뮤니티에 “지참금 2억 대기업녀 vs 무일푼 초등교사”란 글을 올렸다. 다른 조건을 제외하고 경제적인 면만 고려했을 때 누가 좋을까란 질문이었다. 동료 의사들은 줄줄이 댓글을 달며 관심을 보였다. ‘목돈부터 챙기라’는 식의 노골적인 충고까지 나왔다.
이 커뮤니티에는 ‘지참금 받는 방법’이란 제목으로 지참금으로 받을 아파트 명의를 누구로 할지, 3억∼4억 원이 적당할 듯한데 통장으로 받아야 할지 등을 묻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연봉 1억 원당 지참금 15억 원’을 주장하는 셈법이 나오기도 했다. 지참금 관련 글엔 “뼈 빠지게 일하고 아내의 현금인출기(ATM)로 살 수 없으니 받을 건 받자”라는 식의 댓글도 여러 개 달렸다.
로스쿨 도입의 영향으로 변호사의 인기는 다소 줄고 있다. 경기불황 속에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사’자보단 부모의 사업을 물려받은 2세들이 인기 배우자감으로 등장하고 있다. 차일호 방배결혼정보회사 회장은 “부모로부터 부동산을 물려받아 일에 얽매이지 않고 건물임대수입으로 안정적이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부잣집 자식이 변호사보다 인기가 높다”며 “변호사 수가 크게 는 뒤로는 먼저 10대 대형 로펌 소속인지 확인한다”고 말했다.
이혼소송 전문 김채영 변호사는 “결혼 지참금을 주고받는 걸 문서로 약속했다면 계약 자체는 유효하지만 지나치게 높은 금액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상규에 반하는 권리 남용에 해당돼 법적 효력을 잃을 수 있다”며 “지참금이 전제조건으로 깔린 결혼은 결국 서로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법적 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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