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음악 부흥’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인디밴드 오디션을 벌였던 KBS2 TV의 프로그램 ‘톱밴드’ 시즌1이 방영된 게 꼭 2년 전이다. 여느 음악 오디션과 달리 이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스스로 곡을 쓰는 뮤지션들이었고 음악성과 성격 모두 색깔이 분명했다. ‘밴드는 가난하다’는 인식 때문인지, 실제로 현실이 그러해서인지, 무던한 연출과 편집에도 경연은 저절로 드라마가 됐다. 승자의 기쁨도, 패자의 눈물도 너무 절실해 보였다.
밴드음악 전체는 몰라도, 당시 4강에 올랐던 팀은 그 뒤에 ‘부흥’했을까. 찾아가 톱밴드 이후 앨범은 많이 팔렸는지, ‘아이돌 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밴드 음악을 하는지 물었다. 공교롭게도 네 밴드 모두 지하실에 있었다.
“기획사에 가서 뭘 하겠어요”
“할머니 치아 치료에 좀 쓰고…, 축하해주는 친구들한테 술 사는 정도까지만 썼어요. 평생에 한 번 벌 수 있는 돈인 줄 알았죠. 경거망동할 수가 없었어요.”
14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합주실에서 만난 2인조 밴드 ‘톡식’의 드러머 김슬옹 씨는 ‘우승상금 1억 원은 어디에 썼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 21세 청년은 반짝반짝 빛을 내다가 “저희 보세요, 딱 말 안 듣게 생겼잖아요”라며 갑자기 냉소에 빠지기도 하고 “여기 미팅 가도 ‘양아치’가 나오고, 저기 미팅 가도 나오고…”라며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독특한 음악과 수려한 외모로 큰 화제를 모은 톡식은 톱밴드를 마친 뒤 연예기획사 20여 곳으로부터 러브 콜을 받았다. 억대 계약금을 제시한 곳도 있었다. 기타리스트 김정우 씨(26)는 “한동안 사장님들과 미팅만 한 것 같다”며 “우리 음악과 자존심을 조금 버리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회사에 가야 하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은 엇갈린 조언을 했고 기획사들은 마음이 급했다. 대형 기획사에 들어가라는 사람, 반대로 대형 기획사에 들어가는 것은 음악에 대한 배신이라는 사람, TV에 나와 한창 뜬 지금 동요나 애국가를 불러서라도 앨범을 내야 한다는 사람…. 어떤 기획사 관계자들은 “톡식은 우리와 계약하기로 했다”고 떠벌리며 투자자를 만나고 다녔다.
두 청년은 “너희, 지금도 나쁘지 않은데 나랑 좀 하면 진짜 괜찮아질 수 있어”라고 말하는 기획사 대표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이해한다고 믿지 않았다. “기획사 방식으로 하면 우리의 장점이 발휘될까요.”(김정우 씨) “우리가 거기 가서 뭐해요.”(김슬옹 씨)
이들은 독립 레이블에 자리를 잡고 지난해 10월 데뷔앨범 ‘퍼스트 브리지’를 냈다. 요즘은 다음 달 발매를 목표로 한 미니앨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자작곡을 5곡 이상 넣을 생각이다.
‘마음속 빛나는 로망’ 위해
“자고, 작업하고, 음악 듣고, 미국 드라마 보고, 영국 드라마 보고, 또 자고….”
준우승을 차지했던 밴드 ‘포’의 보컬과 키보드를 맡았던 물렁곈(본명 윤영주·27)은 지난해 한 일을 17일 이렇게 설명했다. 3인조였던 포는 톱밴드 방송 중 베이시스트가 탈퇴해 2인조가 됐다. 현재는 물렁곈 혼자서 솔로 활동을 하고 있다. 2월에 첫 솔로앨범 ‘사이키델릭’을 발매했다. 비평가들의 호평을 얻었지만 타이틀 곡 ‘이상한 토끼를 위한 왈츠’는 실시간 음악차트에서 50위권에 오르는 데 그쳤다.
물렁곈은 “내가 할 수 있는 음악은 정해져 있다”고 말했다. 유행이나 인기에 대한 태도는 거의 성불한 사람 수준이다.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음악을 한다, 아이돌 음악은 내게 맞지 않는다, 어떤 음악이 인기를 끌지는 여러 상황이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이며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솔로 앨범에 대한 시장 반응은 나도 모르겠다.’
톱밴드가 방영된 그해에 이화여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물렁곈은 한때 수학 과외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었다. 톱밴드 이후 과외를 그만뒀다. 그는 “음악을 안 한다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잖나”라며 “우리 세대가 전부 ‘88만 원 세대’고 뭘 해도 배고프다고 하니 나는 음악을 하는 데 일말의 고민이 없었다”고 말했다. 집안의 반대는 없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포기하셨어요”라며 웃은 뒤 “어쨌든 학교(대학)도 들어가고 했으니 거기까지는 나도 의무를 다한 셈”이라고 덧붙였다.
“밴드 음악이 없어진다는데 과연 없어질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밴드 하는 사람들 마음 안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로망과 멋이 있기 때문에.”
“아이돌 그룹, 너무 잘한다”
“지난해 공연 수익을 생각해보면…, 소속사에 안 주고 우리끼리만 나눴다면 괜찮았을 것 같아요. 전보다는 훨씬 많이 벌죠. 그전에는 수익이 없었으니까.”
4인조 록그룹 ‘게이트플라워즈’의 드러머 양종은 씨(33)는 17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연습실에서 “주변에서는 우리가 돈을 떼로 긁어모으는 줄 안다”고 말했다. 게이트플라워즈는 4강에 올랐던 팀 중 방송 이후 앨범을 가장 많이 판 밴드다. 2010년에 낸 EP 앨범 ‘게이트플라워즈’와 지난해 낸 정규 1집 앨범 ‘타임즈’가 각각 4000장 이상 팔렸다. 팬도 4500명 수준으로 늘었다. 국내 인디밴드 중에서 수익으로 따지면 20위 안에 들 거라고 한다. 그래도 베이시스트 유재인 씨(32)는 “구체적인 액수를 공개할 수는 없지만 멤버들이 가져가는 돈은 일반 직장인 연봉에 비해서는 훨씬 낮다”고 말했다.
보컬 박근홍 씨(36)는 전직 출판사 편집자, 기타 염승식 씨(32)는 전직 영어 강사이고, 양 씨는 지금도 부업으로 영어 교재의 삽화를 그리기 때문에 이들은 농담으로 ‘우리끼리 영어 책이나 낼까’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밴드를 하기는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왜 음악판이 아이돌 그룹 일색일까. 방송사나 대중의 취향에 대한 비난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이들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유 씨는 비아냥거림 없이 진지하게 “아이돌 그룹들이 너무 잘한다”고 말했다. 염 씨는 “요즘 변화가 있긴 하지만 인디밴드들이 너무 옛날 스타일을 고수한다”고 반성했다. 박 씨는 “아이돌들이 잘하긴 한다”면서도 “그래도 아이돌은 음악의 창작자가 아니니 밴드와는 다르다”고 단서를 달았다. 게이트플라워즈는 올해 안에 새 EP 앨범을 내고 내년에 정규 2집 앨범을 발매할 계획이다.
“네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톱밴드 최고의 수혜자가 아마 백석대일 거예요. 방송 뒤로 입시경쟁률이 엄청나게 높아졌어요.”
4강 팀 중 유일한 연주밴드였던 ‘제이파워’의 곽능희 백석대 교수는 12일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제이파워는 백석대 기독교문화예술학부 기독교실용음악전공인 곽 교수와 차효송 교수 등 두 사람이 이 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을 모아 만든 그룹이다. 그룹의 리더들이자 프로듀싱과 작곡을 담당하는 두 교수는 2011년 톱밴드 방송 때 무대에 오르진 않았다.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쳤던 연주 멤버 4명은 지금은 모두 다른 멤버들로 교체됐다. 당시 멤버 중 두 사람은 현재 이문세 투어밴드의 연주자로 활동한다고 한다.
‘제자들이 음악을 업으로 삼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곽 교수는 “전에는 무조건 용기를 줬는데 요즘은 ‘생계에 있어서 답이 나오진 않는다. 그래도 네가 행복할 수 있다면 음악만큼 좋은 게 없다’고 조언한다”고 답했다. 차 교수는 “저는 학생들에게 금전이나 권력, 성공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고 이야기한다”며 “음반시장에 대해 걱정들을 많이 하지만 좀더 멀리 바라보라고 말한다”고 말했다.
제이파워는 톱밴드 시즌1이 끝날 즈음 정규 2집 앨범인 ‘런 투 유’를 내면서 퓨전재즈라는 그룹 성격을 명확히 했다. 올해 안에 3집을 내고 10집, 20집이 나올 때까지 꾸준히 활동을 하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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