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제비’ 출신 전모 씨(20)는 북한 장마당을 전전하며 구걸하거나 떡을 훔치다 2011년 남한으로 넘어왔다. 배고픔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전 씨는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양강도 사투리는 말이 너무 빨라 알아듣는 아이가 없었다. 지하철에서 형들과 북한말을 하면 우리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아저씨들이 무서웠다”고 말했다. 전 씨가 이런 차별적인 시선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사투리를 최대한 표준말에 가깝게 교정해주는 스피치 학원이다.
22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 취업전문 스피치학원인 핀스피치학원 강의실 문 밖으로 우렁찬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나는 안돼라눈 생가글 한 본 푸므면…” (“‘나는 안돼’라는 생각을 한 번 품으면”)
33m²(10평) 남짓한 강의실 한쪽 대형 거울 앞에 전 씨 등 탈북 청년 5명이 나란히 앉아 이 같은 문장을 연습했다. 아직까지 ‘ㅡ’는 ‘ㅜ’로, ‘ㅓ’는 ‘ㅗ’로 발음되지만 이들은 배에 힘을 잔뜩 주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읽어 내렸다.
‘ㅅ’을 발음할 때 혀가 윗니 쪽에 닿아야 하지만 이들은 혀가 아래로 내려가 아랫니 쪽에 닿으면서 소리가 자꾸 샌다는 게 전문 강사의 분석이다. ‘안녕하십니까’가 ‘안녕하쉽니까’가 된다. 북한 사투리는 표준어와 발성도 달라 호흡이 짧다. 강사가 두 문장은 너끈히 한 호흡에 읽는 잠언집 한 문장을 이들이 읽을 때는 모두 숨이 모자랐다. 탈북 과정에서 중국에 오래 머문 아이들은 ‘ㅟ’와 같은 이중모음에 중국 성조의 높낮이가 섞이기도 한다.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북한 말투는 아직 낯선 남한에서 남들의 눈총을 받았고 이들은 가슴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학원을 찾아온 한 탈북 여대생은 “대학에 와서 연애를 시작했지만 무심결에 북한말을 할 때마다 남자친구가 주변을 의식하며 어색해하는 게 싫었고 결국 헤어졌다”고 하소연했다. 사람들이 무심코 ‘쟤네 조선족인가 봐’라고 수군거릴 때에도 이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월남한 지 길게는 5년이 돼 가는 이들에겐 농구선수, 수의사 등 저마다 남한 사회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많다. 하지만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새터민에게도 북한 어투는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남아 있다. 대학생 한모 씨(21·여)는 여동생까지 데리고 학원을 찾았다. 이력서상 새터민 기록은 어쩔 수 없지만 취업 면접에서까지 북한 사투리 때문에 위축되고 싶지 않았다.
서울 강남경찰서 보안과 염희숙 경위는 “탈북한 청년들의 진로를 위해 바리스타 교육과 같은 직업 교육을 시키고 있지만 사실상 손님을 많이 대하는 서비스업 등 취업 현장에서 북한 사투리를 쓰는 지원자를 꺼리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의 김은영 간사(34·여)는 “2011년 자체 조사 당시 북한 억양 때문에 직장 생활에서 차별받는다는 하소연이 많았다. 북한 출신임을 밝히지 않고 취업했다가 억양 때문에 탄로 나면 직장 동료들의 태도가 돌변하거나 일을 제대로 맡기지 않기도 한다”며 “영호남이나 충청지방 사투리를 쓴다고 해도 단지 그것 때문에 직장 생활이 어려워지는 경우는 드물다. 북한 말투에는 엄연히 다른 차원의 장벽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남경찰서 보안과는 핀스피치학원과 연계해 8일부터 다음 달 말까지 강남권 새터민 학교 기숙사 아이들 14명의 북한 사투리를 교정해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교육비 658만 원은 개인 독지가가 지원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입 크기의 물통을 물고 ‘ㅏ, ㅑ, ㅓ, ㅕ, ㅗ, ㅛ…’ 입 모양 연습부터 복식호흡, 발음 훈련, 자신감 트레이닝까지 포함된 8주간의 교육을 받는다. 핀스피치학원의 김경희 원장(41·여)은 “아이들에게 ‘한 달 후에 누구한테 잘 보이고 싶어’라고 물으면 저마다의 바람이 쏟아진다. 이번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꼭 자신감을 되찾고 당당하게 사회인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