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던 피린민들의 발걸음은 노근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1950년 7월 26일 정오 무렵, 미군은 그렇게 사람들을 쌍굴에 가둔 채 총을 쏘기 시작했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사람들 중 몇몇 건장한 남성들은 어둠을 틈타 가족들의 눈물을 뒤로하고 탈출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쌍굴에는 많은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미군의 공격에 힘없이 죽어갔다. 믿을 수 없게도 총격은 3박 4일 70여 시간 동안이나 계속됐다….”(노근리 평화공원 상영물 자막 내용 중 일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 있는 ‘노근리 평화공원’은 제주도에 있는 ‘4·3평화공원’과 함께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평화와 인권’을 상징하는 곳이다. 전쟁 속에서 이유도 모른 채 숨져 간 넋들을 위로하고, 다시는 이 땅에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아야 함을 가슴 깊이 새기게 만들어 주는 교육의 현장이다.
노근리 평화공원은 2011년 10월 국비 191억 원을 들여 학살 현장 인근 13만2240m²(약 4만73평)에 조성됐다. 공원 운영은 지난해 4월부터 사단법인 노근리 국제평화재단(이사장 정구도)이 맡고 있다. 공원 안에는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 평화기념관, 교육관, 조각공원, 야외 전시장 등이 들어섰다. 또 1940, 50년대 미군의 주력 전투기이자 노근리 피란민 공격에 동원됐던 F-86F기와 미군 트럭(K-511)과 지프(K-111)도 전시됐다.
평화기념관 지하 1층에 들어서면 노근리 사건이 일어난 경과를 영상과 모형으로 복합 연출한 것을 볼 수 있다. 경부선 철도 모형과 쌍굴다리 인근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물도 전시돼 있다. 또 당시 사건의 전모와 피해자, 미군 가해자 인터뷰 등을 담은 15분짜리 영상물도 관람할 수 있다. 지상 1층에는 이 사건을 처음 알린 AP통신의 취재 과정과 국내 매체들이 집중 보도한 내용을 볼 수 있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각각 노근리 사건 진상 조사를 하는 과정과 당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하는 모습도 연출돼 있다. 국회에서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내용도 설명하고 있다. 노근리 사건과 유사한 국내외 전시관들의 정보와 세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됐는지도 알 수 있다.
세미나 참가자 등을 위해 70명이 묵을 수 있는 숙소(2∼20인실)도 마련돼 있다. 방 하나에 하루 2만∼20만 원씩에 이용할 수 있다. 영동군은 방문객을 위해 추억의 생활전시관과 외국어 음성 안내 시스템을 설치하는 등 시설을 보강 중이다. 평화공원에 따르면 개관 이후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9만8136명이 다녀갔다.
박물관 근처의 쌍굴다리도 반드시 들러야 할 코스다. 1934년 길이 24.5m, 높이 12.25m로 가설된 이 교량은 2003년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 59호로 지정됐다. 1999년 철도공사가 상판 갈라짐과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1, 2cm 두께의 시멘트를 덧씌웠다가 탄흔 은폐 논란이 일기도 했다. 영동군은 2011년 이 다리 교각 안쪽에 덮어 씌운 시멘트를 일일이 손으로 긁어 낸 뒤 탄흔을 찾아 보존 처리했다. 정구도 이사장은 “노근리 평화공원은 전쟁의 참상을 겪지 못한 세대에게 왜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지를 알려주는 곳이자 인권 신장과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역사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말했다.
29, 30일 이틀간 ‘정전협정 60년맞이 평화 기행 노근리 평화공원 인권 평화 답사’가 국내외 유명 역사학자와 영화인 등 66명이 참가한 가운데 평화공원 일원에서 열린다. nogunri.net
:: 노근리 사건 ::
1950년 7월 25∼29일 북한군 공격에 밀려 후퇴하던 미군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항공기와 기관총으로 피란민 대열을 공격해 2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 1999년 9월 AP통신의 보도로 알려지게 됐다. 정부는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피해신고를 받아 사망 150명, 행방불명 13명, 후유장애 63명 등의 희생자를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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