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을 당한 기억을 다시금 떠올려야 하는 상황이 되자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주먹으로 계속 가슴을 내리쳐 봤지만 답답한 건 그대로였다. 곁에 앉아 있는 증인지원관이 힘들어하는 그의 손을 잡아주면서 위로를 건넨 뒤에야 더듬거리면서 가까스로 말문을 텄다. 지난달 초 서울중앙지법의 화상 증언실에 마련된 원격 증언 시스템을 통해 A 씨는 변호인과 검사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30대 여성 A 씨는 3년 전 40대 남성 B 씨를 알게 됐다. 둘은 잠시 사귀었지만 A 씨는 B 씨가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자 이별을 요구했다. B 씨는 돌변했다. A 씨를 마구 때리고 성폭행했다. 결국 B 씨는 강간, 폭행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다. A 씨는 B 씨와 평생 마주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지난달 A 씨는 법정에 나와 B 씨의 범행에 대해 증언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경찰 조사에서 수차례 진술했는데도 왜 또 법정에 서서 B 씨와 낯선 사람들 앞에서 아픈 과거를 드러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사소송법상 수사 단계에서의 진술은 검사와 피고인 양측이 모두 동의해야 증거로 인정받는다. B 씨가 재판에서 자신의 범행 일체를 부인하자 A 씨가 법정 진술을 해야만 피해사실이 증거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실제로 피해자가 법정 진술을 거부해 강간 등의 혐의가 무죄가 된 사례도 있었다. A 씨는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이유로 법정에 나오려 하지 않았지만 서울중앙지법 증인지원관이 왜 A 씨의 증언이 다시 필요한지 설명하고, B 씨와 대면하지 않아도 증언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해줬다.
A 씨는 증언하기로 한 날 법원 입구에서 증인지원관을 만나 법관 전용 통로 안쪽에 있는 증인대기실로 향했다. B 씨와 직접 대면할 의사가 없다고 밝히자 A 씨는 법정 밖에 마련된 화상증언실에서 컴퓨터 모니터와 마이크를 통해 B 씨의 변호인과 검사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신문이 끝나자 A 씨는 “증언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긴장했지만 증인지원관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서울중앙지법이 전국 법원 중 처음으로 지난해 도입한 증인지원관 제도를 이용한 성폭력 피해자는 지난달까지 189명에 이른다. 성폭력 피해 여성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도입한 증인지원관 제도는 현재 전국 18개 지방법원에서 시행 중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