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한일고 학생들은 평균 서너 종류의 유니폼을 갖고 있다. 기숙사별, 반별, 동아리별 등 다양하다. “축구 덕분에 혈액순환까지 잘된다”는 학생들. 시험 기간인 2일에도 공을 차며 땀을 흘리고 있다. 한일고 제공
조용하다. 간혹 멀리서 새소리만 들린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덕분일까, 터가 좋아서일까, 아니면 이른 새벽이기 때문일까. 한여름인데도 귓가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은 상쾌한 기분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이때 적막을 깨는 함성. 시끌벅적하다. 자세히 보니 학생들이 축구를 한다. 화려한 유니폼에 선수 같은 몸놀림. 심판복을 갖춰 입은 학생의 표정은 프로 심판 못지않게 진지하다.
잘 관리된 푸른 인조잔디구장. 공을 차는 학생들은 말한다. 최소 하루에 한 번은 이곳에서 축구를 한다고, 전교생 누구 하나 예외가 없다고, 축구가 유일한 낙(樂)이라고. 전교생이 스포츠 특기생인 고교? 명문 축구팀을 가진 고교? 아니다. 일반계 고교인 충남 공주의 한일고 얘기다.
한일고는 매년 입시가 끝날 때마다 입에 오르내린다. 전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대 진학률 덕분이다.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와 진학 실적으로 ‘맞짱’ 뜨는 몇 안 되는 일반고이기도 하다. 서류와 면접을 통해 전국 단위로 학생을 선발하는 자율학교로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한다.
주변은 온통 산이다. 아홉 정승이 나오고 봉황이 알을 낳는 형세라는 구작(九雀)골에 있다. 이런 곳에서 뛰어난 진학 실적을 올리는 비결을 묻자 교사와 학생들은 ‘자율’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학교는 학생회를 학생자치정부라 부른다. 학생들이 전권을 갖고 조직을 구성하고 운영한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렇다고 교사가 편하진 않다. 최용희 교감은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게 오히려 훨씬 더 힘들다. 하지만 습관처럼 자율을 몸에 익힌 학생들은 학업에서도 스스로 계획하고 공부해 눈에 띄는 성과를 낸다”고 강조했다.
학교가 내세우는 또 한 가지 핵심 비결은 40여 개가 넘는 ‘인성교육’ 프로그램. 체육활동은 인성교육의 한가운데 있다. 특히 축구는 체육활동의 중심이자 학생들의 일상이다.
한일고에선 매년 3∼11월 ‘한일리그’가 펼쳐진다. 경기 시간은 매주 월·수·금, 오전 6시 10분∼7시. 같은 기숙사를 쓰는 학생 8명씩 3개 학년을 묶어 24명이 한 팀이 된다. 학년당 방이 20개 있으니 20개 팀이 풀리그를 벌이는 셈. 상위 입상 팀에는 상금과 트로피를 준다. 최우수선수, 득점왕, 도움왕, 야신상(최우수 골키퍼상) 등 개인상도 다양하다.
학생들은 축구를 통해 ‘조화’를 배운다. 3학년 구원희 군(18)은 “같은 방, 같은 학년, 나아가 선후배 관계까지 축구로 이어진다”며 웃었다.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 8명씩 같은 방을 쓰면 3, 4명씩 갈리기 십상이다. 축구 한 게임만 같이 하면 ‘파벌’이 없어지고 8명이 한 몸처럼 어울린다는 설명.
구 군은 “졸업한 선배가 모교를 방문하면 축구를 누가 가장 잘하는지부터 물을 정도”라고 했다. 같이 땀 흘리며 친해진 선배가 졸업하고 후배를 챙기는 경우도 많다.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장이 마련되니 학교 폭력이 생길 여지도 없다.
몇 년 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한일고 학생은 축구를 비결로 꼽았다. 최소 하루 30분 이상 공을 찬 덕분에 집중력이 높아지고, 잡생각이 없어지고, 체력까지 좋아졌다는 말.
한일고 학생은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지 못한다. 인터넷은 제한적으로 쓴다. 이러다 보니 축구는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유일한 통로다. 3학년 김은탁 군(18)은 “학교에는 축구 실력과 성적이 비례한다는 속설이 있다. 실제 최상위권 학생은 대부분 축구 실력이 뛰어났다”며 웃었다. 아침잠이 많은 학생에겐 축구가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특효약이란 얘기도 있었다.
신현보 교장은 “처음 리그전을 시작할 당시, 지나친 승부욕으로 갈등이 생긴 적이 있었다. 그런 부분조차 상대팀 일으켜 주기, 심판 말 잘 듣기 같은 규칙을 마련해 학생들 스스로 해결토록 했다. 정정당당한 승부에 익숙하니 학업에서도 당당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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