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철없는 사나이들이다. 대부분 40대 후반이고 몇몇은 오십 줄에 들어섰다. 이미 손주를 본 사람도 있다. 뙤약볕에 모여 텐트 몇 동을 쳐 두고는 수박을 안주 삼아 맥주와 소주를 연거푸 들이켠다. 지금이 언제라고 20대 초반에 너는 어땠고, 쟤는 어땠지 하며 껄껄 웃음을 터뜨린다. 얘기를 듣자 하니 군대생활을 함께한 사이다. 아직 위계질서도 분명하다. ‘형’ ‘동생’ 대신 ‘선배님’ ‘후배님’이 공식 호칭이다.
누군가는 아침에 도착해 제초기로 풀을 죄다 깎았다고 했다. 또 누군가는 동료들이 오기 전 햇볕을 막아줄 천막을 쳤다. 국립축산과학원에서 일한다는 이는 전공을 살려 오골계와 토종닭을 삶았다. 울산, 거제, 순천에서 출발했다는 이들이 속속 도착한다.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환한 표정으로 뒤늦은 도착을 반긴다.
해가 낮아질 무렵 ‘왕고’로 보이는 인물이 도착했다. 식사를 하다 멈추곤 모두 기립이다. 우람한 체격의 그에게선 카리스마가 넘친다. 그러나 그조차도 단체 티셔츠 착용 의무를 피해갈 순 없다.
“선배님, 옷 안 맞으면 모임서 나가야 합니다.”(최상수 씨·50·경기 부천시)
“잘 맞구먼. 너 근데 말을 왜 글케 서운하게 허냐!”(임달근 씨·52·경기 수원시)
요즘은 뭐하고 사는지, 사업은 잘되는지는 묻는 이가 없다. 입만 열면 “아, 군대에서는∼” “그때 유격훈련 나갔을 때∼” “중대장님이 갑자기 집합시켜서는∼” 따위의 말뿐이다. 정말 징글징글할 정도다. 더 이해되지 않는 건 천막 한쪽에 자리한 아내들이다.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남자들의 군대 얘기라는데, 그 나이 먹도록, 또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도 그걸 참아내고 있다. 그것도 밝은 표정으로.
“우리는 마, 아들내미가 휴가 나왔는데 집에 혼자 내비리두고 왔어요. 오늘 친정엄마도 오신다 캤는데….”
박영미 씨(45·여·경남 거제시)의 투덜거리는 말에 아내들은 “동병상련”이라며 손뼉을 치며 웃는다.
닭 삶는 냄새, 짚 태우는 냄새가 어우러져 경기 이천시 모가면의 한 공터엔 독특한 ‘향기’가 가득하다. 조금씩 얼굴이 발그레해진 사람들의 대화에도 조금씩 취기가 오른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 1박 2일 캠핑을 준비하는 사람들. 그냥 군대 동료들끼리의 모임이라고 하기엔 유별난 구석이 많다. 도대체 이들에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모임 총무라는 김선용 씨(48·경기 안성시)가 “다 지난 일인데요, 뭐”라며 담배를 하나 꺼내 문다. 그러자 한 사람이 슬며시 자리를 뜬다. 근처에 산다는 김범수 씨(51·경기 이천시)다.
“그런 얘기 하려면, 나 없을 때 하소. (주위 동료들을 향해) 나 집에 잠시 다녀올 테니 백숙은 남겨둬라.” #2. 2012년 6월 2일
경기 양주시의 육군 25사단 70연대 11중대. 파란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40, 50대 아저씨 30여 명과 전투복을 빳빳하게 다려 입은 20대 초반 장정들이 마주 섰다. 아저씨들은 청년들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군생활 잘하라”는 덕담을 건네고, 청년들은 “예! 알겠습니다!”라고 목청을 높인다.
연병장에는 플래카드 2개가 위아래로 나란히 걸렸다.
‘한 번의 인연을 소중하게! 70연대 11중대 전우회’ ‘환영합니다, 11중대 서포터스!!’
제대한 지 25년이 훌쩍 넘은 선배들이 ‘모(母)부대’를 찾아온 것이다.
선배들은 한 명씩 앞으로 나와 도열한 후배들 앞에서 인사말을 건넸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후배님들을 보니 꼭 내 아들 같아서…. 흑흑∼ (눈물을 훔치면서) 아이고 쪽팔리그러 내가 와이라노.”
키 178cm, 몸무게 80kg의 건장한 체격을 지닌 강무연 씨(49·대구)가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 불리던 그이기에 모두 당황했다.
강 씨는 3주 뒤 입대할 아들 명수 씨(21)와 27년 전 자신의 모습이 겹치면서 감정이 격해졌다고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 했다. 그는 훗날 “군복무 중인 후배들이 대부분 아들과 같은 나이였다”며 “그런 데다 내가 군대에 있던 시절, 군에 가기 전 부모님 속을 썩인 일까지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방문자 중엔 장군도 둘이나 있었다. 73사단장인 이준용 준장(55)과 3군사령부 인사처장 김창영 준장(51)이었다. 이들은 1986년 각각 11중대 중대장과 1소대장이었다.
이 준장은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우리 선배들은 30년 가까이 좋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너희들도 가혹행위를 삼가고 서로를 감싸주다 보면 여기서 오랜 인연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제군들, 알겠나!”
#3. 1990년 8월 15일
강원 양구군의 2사단에 근무하던 이준용 소령은 이틀 휴가를 냈다. ‘그들’과의 만남을 위해서였다. 전날 밤엔 한숨도 자지 못했다. ‘혹시 아무도 안 나오면 어쩌지’란 걱정이 반, ‘그동안 다들 어떻게 변했을까’란 기대가 반이었다.
날씨는 화창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 들어선 시간은 오전 11시경. 4년 전 약속했던 정오까지는 아직 1시간이 남아 있었다.
“단! 결!” “단! 결!” “중대장님! 단! 결!”
저 멀리서 우렁찬 경례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벌써 십수 명이 모여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방에서 온 누구는 이른 새벽부터 동료들을 기다렸다고 했다.
“잘 지냈나? 다들 많이 변했다.”
“중대장님은 그대로시네요. 우린 이제 사회인이잖습니까. 하하하.”
11중대 1소대장을 지낸 방찬섭 씨(50·당시 27세)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2년 전 전역해 한 식품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중대원들은 끊임없이 모여들어 70명을 훌쩍 넘겼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자신들만 아는 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직접 만든 중대가(歌)였다. 마치 연습을 해온 것처럼 누구도 가사를 틀리지 않았다.
인근 식당으로 옮겨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 누가 그랬다.
“오늘 전방에 한번 가볼까?”
여기저기서 “좋아!” “찬성!” “고!” 따위의 함성이 터졌다. 고속버스 2대를 급히 섭외했다. 몇몇은 근처로 가 ‘짤순이’(탈수기), 축구공, 배구공 등을 사서 버스에 실었다.
오후 3시 ‘한여름의 산타클로스들’이 부대에 도착했을 때 후배 11중대원들은 야외에서 유격훈련에 한창이었다. 같은 부대 출신 선배들의 ‘위문’ 소식에 더위와 먼지에 찌들어 있던 후배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별 말이 오간 건 아니었다. 말주변 없는 선배들은 그냥 “열심히 해라” “집 생각이 나도 조금만 참아라” “전우들끼리 잘 지내라” 등의 건조한 말만 건넸다. 그래도 그 속엔 참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걸 알아채기라도 한 듯 후배들은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4. 1986년 8월 23일
‘우리는 맹호, 행운의 열쇠고리 증정-1990년 8월 15일 12:00 여의도 만남의 광장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나씩 받았다. 그리고 기억했다. 장식품이 아니라 ‘행운의 열쇠고리’인 먼 후일의 골동품이라는 사실을. (중략) 이유가 필요 없다. 취지가 필요 없다. 만남은 그저 성화처럼, 올림픽의 오륜기처럼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 되게 만드니까.’(25사단 70연대 11중대 ‘중대사(史)’ 중에서) #5. 1985년 2월 15일
이준용 대위는 2월 5일 결혼했다. 한창 신혼의 단꿈을 꿔야 할 그에게 국가는 철책근무를 명령했다. 결혼 열흘 만에 중대장으로 처음 부임한 곳이 25사단 70연대 11중대였다.
비무장지대(DMZ)의 겨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추웠다. 경계초소(GP)와 일반초소(GOP)를 번갈아 오가던 11중대의 가장 큰 적은 추위였다.
그러나 이 대위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추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부대 내부에 있다고 믿었다. 전방부대라 군기가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것은 당연했지만, 11중대는 왠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군기를 핑계로 한 구타가 문제였다. 사실 이 대위가 갑작스럽게 부임한 것도 전임 중대장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었기 때문이었다.
고참과 신병, 일반병사와 하사관(현 부사관)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했다. 특히 일반병사로 입대해 동료들과 함께 내무반 생활을 하다 중간에 교육을 받고 하사관이 된 이가 몇 명 있었다. 그런 하사관과 고참 병장들은 ‘계급이 먼저냐 짬밥이 먼저냐’를 두고 소모적인 신경전을 벌였다. 김범수 하사(이천 캠핑장에서 슬그머니 자리를 뜬 이)도 사병들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고, 몇몇에게는 심하게 대하기도 했다.
이 대위는 ‘융화’를 위한 갖은 방안을 짜냈다. 중대가를 만들고, 중대사도 쓰게 했다. ‘맹호 돌격부대’의 이름을 따 ‘맹호 밴드’도 만들었다. 상·벌점 제도도 도입했다. 각 소대 출입구 옆에는 ‘상·벌점 현황판’을 걸어두고 개인별로 잘한 일은 까만색, 잘못한 일은 빨간색으로 표시하게 했다. 내무반 흡연은 ―3점, 군번줄 미착용은 ―2점, 담당구역 청소 양호에는 +3점, 불온 전단을 가장 많이 수거하면 +5점을 주는 식이었다.
이 대위는 특히 고참들에게 “너희들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등병, 일병 때 겪었던 불합리한 처사를 고참이 된 뒤 반복하기보단, 악순환의 고리를 직접 끊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11중대는 조금씩 변했다. 중대원들은 계급, 나이, 경력을 떠나 서로의 벽을 점차 허물기 시작했다. 구타는 자연스럽게 옛 이야기가 됐다. 체육대회, 훈련 심사, 체력 측정 등 모든 부문에서 11중대는 1등을 독차지했다. 이 대위가 부임한 지 15개월째이던 1986년 5월에는 70연대의 수십 개 중대 중 ‘우수모범 병영중대’로 선정됐다.
이 대위는 그 무렵 생각했다. 대한민국 최전선에서 피 끓는 청춘을 함께 보낸 이들이라면 정말 평생을 가도 좋을 깊은 인연이다 싶었다. 그때 떠오른 아이디어가 몇 년 뒤 모두 다시 만날 약속을 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6. 다시 2013년 6월 15일
이준용 준장은 올해 1월 31일 예편했다. 그는 “내가 현역일 때 중대원들을 만나는 건 ‘소집훈련’이었다”며 “지금은 내가 제대했으니 예비군들의 ‘야외 기동훈련’ 정도가 되겠다”고 말했다. 텐트 한쪽에 모아둔 소주와 맥주 상자를 발견한 그는 “오늘 밤에는 아마 밤샘 전술토론을 할 것 같다”며 웃었다. 캠핑 장소는 그가 노후를 보낼 집을 지으려 마련한 땅이라고 했다.
잠시 일을 보러 집에 갔던 김범수 씨가 어두워질 무렵 다시 캠핑장에 돌아왔다. 1980년대 얘기가 여전히 이어지자 되레 큰소리를 친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여.”
고참급인 백수창 씨(51·경남 거제시)가 한마디 거든다.
“옛날 일은 옛날 일 아임니까. 작년 1월에 우리 아들내미가 입대하는데 범수 후배가 같이 따라가 줬어요. 그날 저녁에 맥주 한잔 따라 주는 게 얼마나 고맙던지. 옛날에 섭섭했던 생각은 싹 없어지더라고. 우리 전우들 정이 바로 고런 게 아일까 합니다.”
다시 봐도 참 철없는 사나이들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살다가 가끔씩은 그들처럼 ‘철없이’ 사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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