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공익신고자보호법(2011년 9월 시행)에는 내부고발(공익신고)을 했다는 이유로 조직에서 해임 파면 등의 불이익 처분을 받은 조직원에 대한 보호조치 조항이 포함돼 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불이익을 당한 공익신고자가 보호조치 신청을 하면 내부고발에 따른 불이익 처분이 맞는지를 판단한 뒤 해당 조직에 해임 등의 징계를 철회할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보호조치는 공익신고자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상징적 결정에 그치고 있다. 공익신고자에 대한 보호조치 결정서를 받은 조직은 조직 기밀이 조직원에 의해 새나가는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고 조직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부분 권익위를 상대로 보호조치 취소 소송을 제기한다. 해임 파면 등으로 생계가 막막해진 신고자가 권익위의 승소만을 기다리다 지쳐 스스로 조직에서 나가게끔 합법적으로 보복하는 수법을 쓰는 것이다.
실제로 공익신고자보호법이 시행된 뒤 권익위가 보호조치를 결정한 것은 5건. 이 중 조직에서 보호조치 취소 소송을 제기한 것은 4건에 달했다. 대부분의 내부고발자가 공익신고 이후 해임·파면 등의 심각한 불이익을 받고 있어 보호조치가 시급하지만 보호조치 결정이 곧 소송으로 이어지는 상황이어서 사실상 공익신고자가 신고 이후 보호받을 방법이 없는 셈이다.
스스로 나갈 때까지
KT 직원이었던 이해관 씨는 ‘KT가 소비자를 기만했다’며 지난해 4월 권익위에 신고했다. KT는 제주도가 최종 후보로 오른 세계 7대 경관 선정 이벤트에서 2010∼2011년 전화 투표 통신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씨는 KT가 국내전송망을 사용해 전화 투표를 했는데도 국제전화인 것처럼 소비자들을 속여 국제전화요금을 부과한 의혹이 있다며 이를 신고했다.
그 후폭풍은 거셌다. 이 씨는 그해 5월 경기 안양 집에서 3시간여 떨어진 가평 지사로 전보조치 됐다. 권익위는 이 씨의 보호조치 신청을 받아들여 전보조치 철회를 권고했지만 KT는 취소 소송을 냈다. 행정소송을 제기한다고 해서 보호조치 결정의 효력이 상실되는 건 아니지만 KT는 이를 이행하지 않고 12월에는 이 씨를 해임했다. 권익위는 해임 철회를 요구하는 2차 보호조치 결정으로 대응했다. KT는 이 조치에 대해서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이 씨는 “보호조치 결정이 내려질 때마다 ‘누가 이기나 보자’는 듯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이 상황이 얼마나 더 반복될지 모르겠다”며 “KT는 스스로 나갈 때까지 소송으로 보복하려 한다”고 했다.
현재 민간 및 공공 부문 공익신고자를 포괄적으로 보호하는 공익신고자보호법에는 해당 조직이 보호조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행정소송을 제기하면 소송이 끝날 때까지는 이행강제금이나 과태료 등을 부과하는 식으로 제재할 법적인 근거가 없다. 행정소송에서 권익위가 승소해 보호조치가 유효하다는 확정판결이 나야 보호조치를 강제할 수 있다. 권익위 관계자는 ”현행법으로는 조직이 양심과 윤리에 따라 공익신고자에 대한 징계조치를 철회하도록 바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법조인만 신고하라
2007년 하남시 선거관리위원회 직원이었던 박동건 씨는 하남시장 주민소환투표 진행 과정에서 투표 청구 서명부가 조작된 사실을 발견했다. 박 씨는 시 선관위 담당자가 이 사실을 은폐·묵인하려 한다며 이를 폭로했다. 이 제보로 박 씨는 타 지역으로 전보조치됐다. 권익위는 당시 부패방지법에 근거해 박 씨에 대한 신분보장조치를 해줄 것을 선관위에 권고했다. 이에 불복해 선관위가 제기한 소송에서 권익위는 1심에서는 이겼지만 2009년 2심에서 패소했고 사건은 이후 4년째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2심 법원은 “공직자가 의도적으로 조작을 묵인했다기보다 단순 부주의에 따른 것이어서 부패행위로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권익위가 부패방지법을 적용해 박 씨에 대한 신분보장조치 결정을 내린 것은 부당하다”고 판시했다. 공익신고자의 제보 내용이 사실일 경우에만 공익신고로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의 판결이었다. 내부고발이 사실로 확인되지 않을 경우 어떠한 보호조치도 받을 수 없다는 것. 이 소송이 진행 중이던 2009년 3월 선관위는 권익위의 신분보장조치를 무시하고 박 씨를 파면했다. 박 씨는 선관위를 상대로 복직소송을 해 승소한 뒤 지난해 4월 복직했지만 선관위는 다음 달 또다시 박 씨를 해임했다. 권익위와 선관위 간의 소송이 대법원에 묶여 결론이 안 나는 사이 박 씨는 4년 넘게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류하경 변호사는 “공익신고자는 신고 내용이 법원에서 유죄로 선고될 거라는 100%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신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박 씨 사건 판결은 결국 공익신고자가 모든 법적 판단을 다 한 뒤에 신고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법 지식이 풍부한 법조인이 아닌 이상 내부고발을 할 수 없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180개에 속해야 산다
현재 공익신고자보호법에는 공익침해행위 대상 법률이 농산물품질관리법, 식품위생법 등 180개로 한정돼 있다. 이를 두고 공익신고로 인정되는 범위가 너무 좁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해관 씨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보호조치 취소 소송에서 KT는 “권익위에 신고된 내용을 공정거래위원회와 방송통신위원회가 2차 조사한 결과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으로 방통위로부터 과태료 350만 원을 부과하는 데 그쳤다. 전기통신사업법은 공익신고자보호법에서 규정하는 법률 180개에 속하지 않으므로 해당 신고는 공익신고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법원은 올해 5월 법조문을 그대로 적용한 원고 측 주장을 받아들여 KT의 손을 들어줬다.
김형태 서울시 교육의원도 양천고 교사로 재직하던 2008년 양천고 재단인 상록학원 이사장과 재단의 공사비 부풀리기 등의 비리를 공익신고 했다가 파면당했다. 그러나 사립학교가 부패방지법이 적용되는 공공기관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김 의원은 당시 신분보장조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공익신고자보호법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도 사립학교법이 180개 법률 안에 속하지 않아 김 의원의 신고는 공익신고로 인정받을 수 없다. 결국 그는 파면 상태에서 개인이 행정소송을 거는 방법으로 재단과 최근까지 긴 싸움을 벌이다가 어럽게 승소했다.
공익신고 당시 신고자는 대부분 관련 신고 내용이 180개 법률에 해당한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신고한다. 현행법 하에서는 법원이 이 같은 보수적 선고를 할 수밖에 없어 내부고발을 위축시키고 법의 입법취지도 살리지 못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지문 공익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 부대표는 “공익신고자 보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만큼 조사 결과 공익신고자의 신고 내용이 180개 법률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법원이 법을 폭넓게 해석해 공익신고로 인정해야 내부고발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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