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는 듯한 무더위와 폭우를 보면서 여름이 왔음을 새삼 느낍니다. 정열적인 계절, 여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악기는 바이올린 아닐까요. 쨍쨍한 태양빛 같으면서도 청명하고 화려한 빛깔의 소리를 내니까요.
동아일보의 7월 12일자 A21면에는 ‘바이올린계 20대 트로이카의 한 축 김다미’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요. 이 기사를 생각하며 오늘은 천부적인 재능과 함께 특별한 매력을 발산했던 20세기 바이올린의 거장 트로이카를 소개할까 합니다. 야사 하이페츠(1901∼1987), 다비트 오이스트라흐(1908∼1974), 레오니트 코간(1924∼1982)입니다.
○ 신이 선택한 전설, 야사 하이페츠
하이페츠는 1901년 2월 2일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빌니우스 극장 관현악단의 악장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습니다. 하이페츠는 세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웁니다.
여섯 살 때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를 연주하며 공식 데뷔를 합니다. 당시 유명 음악평론가들로부터 파가니니의 환생, 신동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찬사를 받습니다. 9세(1910년)가 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당시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하고, 몇 해 뒤에는 세계 최정상의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합니다. 이날 연주는 유럽 음악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지상 최고의 연주회로 평가받습니다.
명성이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까지 알려지면서 1917년 10월, 16세의 나이로 세계 최고의 공연장인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연주를 합니다. 이후 71세의 나이로 공식 은퇴를 하기까지 수십 장의 명반을 남겼습니다. 은퇴 이후에는 남캘리포니아대 교수로 취임하여 후학을 양성합니다.
하이페츠는 ‘연습광’으로 불릴 만큼 바이올린을 평생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연습을 했습니다. 그는 세상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최고의 실력을 가졌지만 끊임없이, 꾸준하게 노력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바이올린과 음악, 그 자체였습니다.
○ 인간적이었던 연주자, 다비트 오이스트라흐
오이스트라흐는 1908년 9월 30일 우크라이나의 남부이자 대표적 음악도시로 손꼽히는 오데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유대인입니다. 아버지는 평범한 사무직이었지만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할 만큼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습니다. 어머니는 국립 오페라극장의 단역가수 출신이었답니다. 이렇듯 음악을 사랑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기에 일찍부터 음악가를 꿈꿨는지 모릅니다.
그는 다섯 살에 정식 바이올린 레슨을 받기 시작해서 1923년 열 다섯의 나이로 명문음악학교인 오데사 콘서바토리에 입학합니다. 1926년에는 첫 독주회를 엽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음악을 공부해서인지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함은 물론이고 많은 음악 관계자의 눈에 띄어 이듬해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합니다.
1935년 소비에트연방 음악콩쿠르에서 우승합니다. 또 최고의 음악콩쿠르로 칭송받던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서 준우승을, 1937년에는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합니다. 2년 뒤에는 러시아의 명문 음악학교인 모스크바 콘서바토리(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국립음악원)의 정식 교수로 임용됩니다.
승승장구하던 오이스트라흐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서유럽 국가에서의 연주 계획과 미국 무대 진출의 꿈이 중단됩니다. 그러나 오이스트라흐는 좌절하지 않고 연습과 후학 양성에 더욱더 열정을 쏟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1949년 핀란드의 헬싱키 연주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고 1955년에는 꿈에 그리던 미국에서의 데뷔 연주회를 갖습니다. 그는 언제나 열과 성을 다해 제자를 가르쳤고, 후배 음악가를 챙겨주고 격려했습니다.
○ 강렬한 개성을 표출했던 레오니트 코간
코간은 1924년 11월에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에서 사진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출생일이 14일인지 24일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자 그의 부모는 더 나은 교육환경을 제공하려고 모스크바로 이주합니다.
부모의 지원과 희생에 보답이라도 하듯 열 살이 되던 해에 모스크바 중앙음악학교에 입학하고, 이후에는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최연소로 수석졸업을 합니다. 재학 당시에도 많은 교수의 극찬을 받다가 1941년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의 그레이트홀에서 러시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모스크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며 공식 데뷔무대를 갖습니다.
이를 계기로 자신감을 얻으면서 코간은 세계 최고의 콩쿠르에 도전합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고(1947년), 세계 3대 국제음악 콩쿠르로 권위를 인정받는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트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합니다(1951년).
그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개성 넘치는 연주로 많은 팬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952년에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모교인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의 교수로 임용됩니다. 1982년 겨울, 아들이자 같은 음악가의 길을 걷던 파벨 코간과 함께 러시아 전국 순회공연을 위한 여행을 하다가 기차 안에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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