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기업 부회장 자녀의 입학으로 촉발된 영훈국제중학교 신입생 선발 관련 재단 비리 사건이 최근 들어 ‘마녀사냥’ 양상으로 변질되고 있다.
대기업 부회장 자녀의 자퇴, 사법기관의 책임자 처벌에 이어 부정입학자 전학 등의 조치가 잇따르고 있지만, ‘대규모 입학 비리의 온상 영훈 국제중 전교생 500명 전원이 부정입학자다’라는 인식은 날이 갈수록 고착화하고 있다. 일부 교육의원과 상당 수 언론이 나서 국제중 지정 취소까지 주장하고 있어 ‘전교생 부정입학’ 인식을 부채질 하는 분위기다. 일반인들은 ‘설마 9명 부정 입학했다고 학교를 없애겠어? 500명 전체가 부정 입학했으니까 없애자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여론의 척도’인 인터넷에는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모욕적인 내용이 수시로 댓글로 오르고 있다. 영훈 국제중학교 스쿨버스가 지나갈 때면 행인들이 손가락질을 하는 경우 목격되고 있으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다른 승객이 주먹으로 위협하기도 해 학생들은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가방 끈으로 학교 로고를 가리고 있다.
영훈국제중과 재학생, 그리고 학부모들이 이처럼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은 재단의 신입생 선발 비리가 1차적 원인이다. 하지만 일부 교육의원의 선동과 자의 반 타의 반 독자와 시청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언론의 여론몰이 식 보도도 영향이 크다.
검찰은 수사 결과 발표에서 “9명이 성적조작을 통해 입학했다”고 밝히면서 “연인원 800여명에 대한 ‘성적 조작’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2년간 신입생 총 300명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3000명의 지원자 중 1차 서류 전형 결과 하위 800위 미만의 2차 평가를 사실과 다르게 했다는 것이었다.
검찰 발표에 따르면 실제로 이 학교는 하위 800명의 2차 평가를 전문 교사에 맡기지 않고 일반교사가 형식으로 채점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선 교사들은 “2차 평가에서 전원 만점을 준다고 해도 합격권에 들기 힘든 등수의 지원자들까지 밤을 새 가며 채점하는 게 무슨 의미냐”라면서도 “하지만 원칙대로라면 불합격 권이라도 엄장한 채점을 해야 하니 잘못한 것은 맞다”고 입을 모은다.
불합격 권의 성적을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법기관과 교사들 모두 “그래도” 인정하는 부분이며 책임자들은 현재 사법처리 중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용어 선택에 따라 ‘배임’, 또는 ‘업무상 과실’로도 볼 수 있는 불합격 권 부실 채점이 ‘대규모 성적 조작, 대규모 입시 부정’으로 규정되면서 이미 영훈 국제중에 재학중인 전교생 500명 전원이 성적조작으로 입학한 것처럼 매도 당하는 과정이 뒤를 이었다.
검찰의 발표는 “2년간 9명이 성적 조작을 통해 입학했다”와 “800명의 성적 조작이 있었다” 두 가지였는데, 거의 대부분의 언론은 이 두 가지 발표 중에서 ‘섹시한 800’을 선택했다.
‘800명 대규모 조직적 성적 조작’이라는 보도가 다음날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을 뒤덮었다. 극히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는 ‘불합격 권 부실 채점’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일반인들은 “아니 뭐야, 전교생이 500명인데 800명 성적을 조작했으면 전교생 500명 전원이 돈 내고 입학한 애들이고 돈 내고도 떨어진 애들이 300명 아니냐?”라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국제중 지정 폐지와 더 나아가 ‘폐교’ 논란이 불붙은 것은 이 때부터다. “돈을 내고 성적 조작을 해야만 신입생을 받는 학교라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교육의원 등 일부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지정 폐지를 더욱 거세게 밀어 부쳤다.
여론이 형성되고 5000만 국민이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그때부터 정당하게 실력으로 입학한 영훈국제중 학생들과 학부모의 명예와 교육받을 권리는 철저하게 실추되고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호도된 여론과 왜곡된 검찰 수사결과와 달리, 현재 영훈국제중 재학생 500명은 성적 조작과 무관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성실히 학교 생활하고 열심히 공부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영훈국제중에 지원했고, 엄정한 평가와 면접을 거쳐 경찰관 입회 하 마지막 추첨까지 통과해 정정당당하게 입학했다.
하지만 이 같은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얘기 조차 “네 아이가 실력으로 입학했다고 착각하지 마”라는 막무가내 우격다짐과 이런 우격다짐에 동조하는 절대적 다수의 벽에 부딪히기 일쑤다. 평소 친분 있는 주위 지인들 조차 “전교생이 부정입학생인데, 전학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을 꺼낼 때는 억장이 무너지면서도 여론 몰이의 부당함과 무서움에 몸서리 친다.
‘버스 운전사가 문제가 있으면 운전사를 바꾸면 되고, 차가 문제가 있으면 차를 바꾸면 된다’는 최근 한 교육자의 주장이 눈길을 끈다. ‘버스 회사 자체가 부정의 온상이니까 그 회사를 없애야 하는 게 맞다”라는 일부 누리꾼의 주장도 일리가 없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학부모로서 그들 누리꾼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버스를 없애야 하느냐고. 버스 회사 일부 관계자의 비리와 새치기한 승객 9명 때문에 정당한 방법으로 티켓 끊고 줄 서서 버스에 오른 탑승자 500명이 중간에 내려서 걸어 가는 게 ‘정의’ 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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