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디지털 음악인의 디지털 디톡스 서울 도전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3일 03시 00분


코멘트

스마트폰을 껐다… 2년 사귄 여친 번호가 안 떠오른다

디지털 음악인 왕두호 씨(27)가 ‘디지털 없이 살아 보기’에 도전했다. 왕 씨는 하루에 15시간씩 컴퓨터를 활용해 음악을 만들고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친구들과 소통해 왔다. 3주간의 디지털 디톡스를 경험한 그는 “우리 세대에게 스마트폰과 컴퓨터는 물이나 공기만큼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디지털 음악인 왕두호 씨(27)가 ‘디지털 없이 살아 보기’에 도전했다. 왕 씨는 하루에 15시간씩 컴퓨터를 활용해 음악을 만들고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친구들과 소통해 왔다. 3주간의 디지털 디톡스를 경험한 그는 “우리 세대에게 스마트폰과 컴퓨터는 물이나 공기만큼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1986년에 태어난 필자는 디지털에 길들여진 음악인이다. 컴퓨터로 음악을 작곡하고 녹음해 돈을 벌고 있으니 ‘전자 음악가’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른다.

나의 일상은 또래들과 엇비슷하다. 아침 8시, 스마트폰 알람이 울리면 누운 채로 e메일을 확인한다. 혹시 누가 내 페이스북에 ‘좋아요’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지, 오늘의 날씨와 주요 일정도 챙긴다. 씻고 나서 바지에 다리를 꿰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도 스마트폰은 항상 곁에 있다. 오늘 뉴스는 무엇일까? 누리꾼 사이의 화제는? 어제 스포츠 경기 결과도…. 차에 오르면 내비게이션 안내와 함께 오늘 나온 신곡을 음악 애플리케이션(앱·응용프로그램)으로 들으며 스튜디오로 출근한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 컴퓨터, SNS…

컴퓨터와 각종 음악 장비의 전원을 올리면 업무 시작이다. 음악 관련 장비는 이제 디지털이 대세다. 여전히 음질 때문에 아날로그를 선호하는 전문가도 일부 있다. 하지만 품질, 관리 비용, 편리성 모든 면에서 디지털의 완승이다.

작곡도 이제는 컴퓨터의 몫이다. 60만 원대 작곡 전용 소프트웨어를 구입하면 더는 악보를 그리거나 복잡한 녹음기계를 다룰 필요가 없다. 하루에 15시간 이상 들여다봐야 할 정도로 믿고 의지하는 든든한 ‘동반자’다. 두세 시간 집중하면 노래의 윤곽이 잡힌다. 중간 결과물을 mp3로 바꾸고 e메일에 실어 고객에게 보낸다. “데모 확인하세요!”라는 카카오톡 메시지와 함께.

이런 와중에도 스마트폰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징징댄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 스마트폰의 달력을 꺼내 방금 나눈 내용을 그대로 입력한다. 그러면 당분간 상대방의 이름이나 용건 혹은 약속 시간을 따로 기억할 필요가 없다. 따지고 보면 스마트폰은 나의 ‘수첩’을 넘어 ‘두뇌’의 일부다.

사람과의 만남도 줄었다. 새롭게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귀찮고 낭비적인 일이었다. 작업 도중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토스트 가게 아줌마와 중국집 배달원이 전부다. 좁은 공간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결코 외롭지 않다.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덕분이다.

네트워크 이탈은 불안 그 자체

변화의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지난달 초. 비가 세차게 내리던 새벽. 작업을 거의 마치고 결과물을 보내려는 찰나 갑자기 인터넷 연결이 끊겼다. 순간 아무 일도 진척시킬 수 없었다. 잠시 일을 미루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SNS에 연결된 이들을 찾았다. 무언가 불안했던 탓이다.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스마트폰으로 SNS 친구들에게 댓글을 남기고 채팅창의 지인을 호출했지만 답이 없었다. 막막하고 고립된 기분은 꽤 오래 지속됐다.

이런 경험이 영향을 끼쳤는지 ‘디지털 디톡스’에 호기심이 쏠렸다. 과연 나도 디지털과 단절돼 잠시라도 살 수 있을까. SNS 친구가 아닌 진짜 친구들은 잘들 살고 있을까?

소극적인 ‘디지털 디톡스’에 도전하기로 했다. 우선 다음과 같은 5가지 원칙부터 실천하기로 했다. 일주일간 적응 기간을 가진 뒤 스마트폰을 끄고 구식 휴대전화를 사용하기로 맘먹었다.

<적응 기간에 지킬 원칙>

1. 하루에 컴퓨터를 만지는 시간은 4시간만.

2. 모든 일정 관리는 종이 다이어리로, 가능하면 암기.

3. 스마트폰을 꺼내기 전엔 반드시 목적 말하기.

4.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하루 3회만 확인.

5. 지인이라면 SNS 댓글이 아닌 전화로 안부 묻기.

일주일 만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컴퓨터를 하루에 4시간만 쓴다는 원칙이 종종 깨졌다. SNS는 순전히 습관의 문제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디지털 디톡스를 위한 첫 주가 시작됐다. 4년 전에 쓰던 피처폰을 꺼내 이동통신 대리점을 찾았다.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LTE 사용자는 구형 방식의 기기로 변경하는 것이 불가능하단다. 고심 끝에 지인의 ‘011’ 번호를 잠시 빌렸다.

이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전화를 걸어 온 상대방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습관처럼 무서운 게 또 있을까. 전화는 물론 문자메시지(SMS)를 주고받을 때도 상대방이 누군지 미리 알고 의사소통했던 것이다. 가장 크게 난감했던 것은 함께 일하는 이들의 번호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심지어 적어두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2년을 만난 여자 친구의 번호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 속에 남은 번호란 집 전화와 나의 휴대전화뿐이었다.

이틀째가 되자 목소리로 상대를 유추하고 답하는 요령이 생겼다. “누구시죠”라는 질문도 당당하게 건넬 수 있었다. 정작 문제는 자판이었다. 우리 손은 이미 스마트폰의 큼지막한 자판에 익숙해져 있었다. 결국 문자 대신 통화로 모든 의사소통을 해결했다.

4일째. 스마트폰을 잠시 켰다. 지인의 전화번호가 반드시 필요했다. 오랜만에 접한 스마트폰 액정은 마치 노트북만큼 커 보였다. 순간 스마트폰의 진동이 수십 차례 반복해 울렸다. 밀린 카카오톡 메시지다. 이를 애써 외면하고 전화번호부를 열어 필요한 전화번호들을 노트 위에 적어 내려갔다. 냉장고 안의 치즈 케이크를 보고도 눈을 질끈 감는 것 같은 상황이랄까.

5일째. 지갑에 넣어 둔 자그마한 종이 전화번호부를 꺼내 번호를 일일이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특별히 불편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자주 전화를 거는 몇몇 번호, 특히 가족과 여자 친구 번호는 자기 전에 암기한 덕분인지 기억이 났다.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하루하루 날이 흐를수록 피처폰엔 적응이 돼 갔지만 다른 근심이 쌓여 갔다. 바로 스마트폰에 중요한 메시지가 쌓여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카카오톡 메시지 내용만 확인할까 하는 욕구가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스마트폰을 쓰지 않은 채로 6일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일주일째 되던 날,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됐다. ‘잠깐만 확인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스마트폰을 켰다. 수많은 작업 상담 의뢰 문자가 쏟아져 나왔다. 일주일간 수많은 고객을 놓친 것이다. 이후 나는 스마트폰을 끌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첫 디톡싱 시도는 일주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디지털 기기 없이 노래를 만들 수 있을까?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흐른 7월 중순 약간의 오기가 생겼다.

‘이번에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동료 음악인들은 “말도 안 된다”고 코웃음 쳤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음악 작업은 녹음은 물론 편집과 편곡까지 모두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지한다. 우리가 듣고 있는 음악은 모두가 디지털의 산물인 셈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작곡, 편곡 등 음악의 모든 과정은 물론 작사까지도 워드프로그램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도 비틀스는 명반을 만들었고 김광석의 앨범은 지금 들어도 가슴 절절하다.

우선 장비부터 도전했다. 컴퓨터 없이 녹음할 수 있는 구형 장비가 필요했다. 경기 고양시 일산의 한 음향장비 업체를 찾았다. “PC 없이 녹음해 보고 싶다”는 요청에 업체 사장님이 먼저 말렸다. 순간 20년 전쯤 아버지가 큰맘 먹고 구입했던 오디오 세트에 들어있는 테이프 녹음기가 생각났다. 직접 믹서에 연결하고 녹음해 봤다. 성공이었다.

후배 여가수를 설득해 녹음에 나섰다. 테이프 녹음 방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한번에 마쳐야 한다. 다행히 녹음에는 성공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나쁜 음질은 뒤로 하더라도 편집 자체가 불가능했다. 테이프를 잘라서 붙이는 방법이 있다지만 이제껏 한 번도 가위질 편집은 해본 적이 없었다.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악보 그리기였다. 소설가가 노트북이 아니라 원고지에 작품을 쓰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도전이었다. 악보는 일견 낭만적이다. 과연 그럴까?

요즘은 연주만 하면 컴퓨터가 악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형식에 맞게 그려 주는 시대다. 마지막으로 펜을 꺼내서 악보를 그려 본 시점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오선지에 멋들어지게 제목을 쓰고, 음표를 그리는데 묶는 방법과 방향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쉼표 모양조차 헷갈렸다. 교과서를 참고해 어렵사리 악보를 그리고 난 뒤 심각한 회의감이 밀려왔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 내가 만들어 내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과연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내가 500년 전의 사회로 시간여행을 한다면, 그 원시 사회에 현대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과 지식을 얼마만큼 전수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6년 아버지가 적금을 깨서 사 오셨던 PC는 하나의 가전제품이었다. 그러나 이제 컴퓨터는 신체의 일부다. 나 혼자서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의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만만치 않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체험한 디지털 디톡스의 의미였다.

왕두호 디지털 음악인·기타리스트 fourplay@gmail.com




#디지털 디톡스#왕두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