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20년째 같은 일을 하면서도 이 순간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32일까, 33일까. 둘 중 하나로 결정해야 한다.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맞히는 건 당연하고, 틀리면 온갖 비난이 쏟아진다. 수많은 자료를 분석하고 베테랑들의 의견을 참고했지만 오늘따라 계속 망설여진다. 오후 4시가 임박했다. 결정은….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던 이달 12일. 말복(末伏)인 이날 오후 4시 서울 동작구 보라매공원 옆 기상청 내 국가기상센터에는 ‘하늘만 쳐다보고’ 살아온 예보관 10명이 모였다. 한 시간째 머리를 맞대고 있다. 오후 4시까지 내일 낮 기온을 결정해야 통보문 작성을 거쳐 5시까지 국민에게 예보할 수 있다. 이날 총괄예보관은 박경희 예보관. 하루씩 돌아가며 맡는 총괄예보관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예보를 한다. 박 예보관은 “비가 올지 예보하는 것보다 온도를 예측하는 게 더 힘들다”고 했다. 올해는 전력난으로 대정전 사태까지 우려되는 게 그에게 큰 부담이다. 온도를 잘못 예보하는 게 왜 전력난에 영향을 미칠까. 》
32도와 33도 사이
기상청 예보관들은 10명씩 4개조로 나눠 밤낮으로 교대근무를 한다. 예보는 오전 11시와 오후 5시, 밤 11시와 새벽 5시 등 하루 네 번이다. 요즘처럼 폭염이 기승을 부릴 때는 오후 5시 예보가 가장 중요하다. 이날 예보가 기업과 국민들의 대정전 대비에 참고가 되기 때문이다.
박경희 예보관 근무조의 10명은 오후 3시 기상청 2층에 자리한 국가기상센터에 모였다. 이제부터 갖은 정보를 모두 모아 내일 날씨 예보를 결정해야 한다. 앞쪽에 가로로 길게 설치된 멀티비전 화면에는 한반도 상공의 위성영상과 일기도, 수많은 그래프가 한꺼번에 띄워져 있다.
기상청 1층 로비의 온도계는 섭씨 32도를 나타냈지만 이곳은 25도. 꽤 시원하다. 이곳 온도가 26도를 웃돌면 국가기상센터의 수많은 장비들이 다운될 수 있다. 이는 곧 재앙이다. 기상청 전체에서 가장 시원한 곳에 모였지만 시원함보다는 긴장감이 두드러졌다.
인희진 예보관이 먼저 나섰다. “저는 내일(13일) 예보에서 최고기온을 오늘 수준인 33도(서울 기준)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각 반론이 쏟아졌다. “새벽에 5.5km 상공의 기온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오는데, 오늘 예보보다 기온을 1도 내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인 예보관은 “1.5km 상공에서는 내일 아침 기온이 오늘과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5.5km 상공의 찬 공기 영향은 제한적입니다”라며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1도를 놓고 반론과 재반론이 한 시간째 이어졌다. 32도와 33도가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예보를 발표할 때는 기상학적 분석뿐 아니라 예보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편익이나 비용도 고려해야 합니다. 오늘 한전에서 예비전력량이 2%대까지 떨어졌다고 하던데요. 이럴 땐 예보가 1도만 조정돼도 관련 기관들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죠.”
인 예보관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요즘 같을 때 최고기온이 32도와 33도 사이로 예상되면 높은 숫자를 택한다”고 귀띔했다. 국민과 기업, 기관 등이 전력난에 좀 더 경각심을 갖고 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기온이 1도 오르면 전력사용량은 150만 kW 늘어난다.
매일 국민 앞에 서다
결정은 내렸다. 내일 낮 서울 기온은 33도로 예상된다는 거다. 이제 국민에게 알리고 하늘에 기대야 할 일만 남았다. 예보 회의가 끝나자 국가기상센터 옆방인 예보기술분석과가 바빠졌다. 예보관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의 취재 전화와 기상캐스터들의 문의 전화가 3시 반경부터 쉴 새 없이 걸려오기 때문이다.
깔끔한 말솜씨로 ‘방송인’으로 불리는 김성묵 위험기상대응팀장과 같은 팀 박정민, 최정희 예보관이 돌아가며 나섰다. 매일 이 시간이면 예보관 한 명이 세 번씩 카메라 앞에 서게 된다.
김 팀장은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기자들의 전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국민 심판대’ 앞에 선다. 판결에 걸리는 시간은 딱 하루다.
요즘 더위가 최고 이슈여서 인터뷰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 김 팀장은 “국민 앞에 서는 것이므로 무조건 쉽게 풀어 설명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10초짜리 방송을 녹화하는 데 15∼20분씩 걸리기도 한다. 끊임없이 울리던 언론의 전화가 오후 5시가 되자 잠잠해졌다. 갑자기 독서실처럼 조용해졌다. 세 사람은 책상에 앉아 모니터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언론 대응 업무가 끝나고 ‘분석 업무’가 시작됐다.
김 팀장은 컴퓨터 화면과 책상에 10장이 넘는 일기도를 깔아 놓았다. 올해 장마가 정확히 언제 끝났는지 분석하는 중이었다.
“특히 올해는 장마 기간이 역대 가장 길었던 탓에 기상학적으로 정확한 종료 날짜를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해요. 내년 이후 장마 때 참고가 되니까요.”
올해 장마 종료일을 확정하는 데 2주 걸렸다. 기상청의 전체 부서가 의견과 자료를 주고받으며 논의해야 하는 일이다.
박 예보관은 영어로 된 논문을 옆에 놓고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민을 대상으로 하는 해양기상 서비스의 정확도를 높이는 연구를 하고 있다. 기상청 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박 예보관은 올해 6월 말 수협 연구원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했다. 야심 찬 연구는 긴 장마와 기록적 폭염 탓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위험기상예보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연구를 맡은 최 예보관은 “장마가 시작되고 난 후로는 기상예보 분석과 방송 녹화를 하느라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래 언론 대응을 하지 않았던 그는 유별났던 올해 장마와 폭염 때문에 7월부터 지원사격에 나서고 있다.
숙제는 늘 많다. 그중 하나는 실패 분석이다. 사무실 벽에 걸린 칠판에는 ‘7월 7일자, 15일자, 22일자 빗나간 예보 다시 분석’이라고 적혀 있었다. 예보관들은 종종 ‘하늘이 무심하다’는 말을 떠올린다.
가끔은 하늘이 무심하다
오후 7시. 국가기상센터에는 낮 회의 때 보던 분주함은 없었다. 입과 몸이 한가해진 대신 손가락과 눈동자가 바빠졌다. 모두가 한 자리마다 3개씩 설치된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인상을 찡그리기도 하고 바쁘게 자판을 두드리기도 했다.
5개 지방기상청과 전국 45개 기상대, 항공기상청이나 국가태풍센터 등 산하기관 사이에 오가는 한 줄짜리 보고나 간단한 논의는 기상청 전용 메신저로 주고받는다. 이날도 메신저를 통해 9개 시군의 폭염특보가 새로 내려지거나 조정됐다.
오후 7시 반이 되자 국가기상센터로 예보관 10여 명이 들어왔다. 8시에 교대할 야간 근무자들이다. 김태수 통보관이 방금 출근한 교대 근무자들을 뒤에 세워 놓고 주간 예보 모니터 앞에 섰다.
“우리 예보장(슈퍼컴퓨터 분석 결과)을 보니까 북쪽에서 토요일쯤 찬 기압골이 접근하는데, 이러면 일요일(18일) 아침 기온이 조금 더 낮아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일요일 오후엔 비도 오겠는데….”
이날 저녁 발표된 18일 아침 기온은 26도. 예보 조정 여부에 따라 열대야 예보도 해야 한다. 1도를 수정할지 말지를 놓고 30여 분간 논의가 이어졌다.
10여 장의 일기도와 수십 장의 위성사진, 그 외에도 30여 가지 참고 자료에다 슈퍼컴퓨터 분석 결과까지 참고했다. 하지만 이상 기후가 많아지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비구름이 생기거나 폭염이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 이럴 땐 하늘이 무심하다.
경제학자는 틀려도 되지만…
오후 8시를 넘어서면서 모두가 한숨을 돌렸다. 오후 11시에 발표하는 다음 예보 회의 때까지 한숨 돌릴 시간이 생겼다. 오전 8시부터 치솟는 수은주를 쫓아가며 숨 가쁘게 달린 지 12시간 만이다.
예보기술분석과에는 김 팀장 혼자 남았다. 매일 14시간씩 일하면서도 싫은 기색이 없다. 대학에서 대기기상학과를 택한 건 우연이었지만 지금은 운명이라고 느낀다. 그는 공군 기상장교로 근무하던 2005년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경험했다. 공항 기상대와 관제탑을 오가며 세계 정상들이 탄 비행기가 안전하게 내리는 데 일조하면서 ‘내가 하는 일이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는 기상업무 외에는 한눈을 팔아본 적이 없다.
예보관들의 직업병은 치아질환. 스트레스 때문인지 이와 잇몸이 성한 사람이 드물다. 기상청의 총괄예보관 4명 가운데 3명이 임플란트 시술을 받았다. 이들의 스트레스는 365일, 24시간 동안 계속된다.
“야간 근무 때 예보를 발표한 뒤 아침 퇴근길에는 하늘만 쳐다보고 집에 갑니다. 예보가 틀리면 퇴근해서도 잠을 못 자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컴퓨터를 켜 놓고 계속 현황판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왜 틀렸는지 분석하게 됩니다.”(김 팀장)
“현재 기상관측 기술로는 태풍 예보에 약 200km 정도의 오차가 생깁니다. 우리 국토의 동서 폭이 200km 정도죠. 태풍이 서해로 올라온다고 예보했는데 동해로 올라올 수 있다는 거죠.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인 예보관)
기상청에서 드물게 아직은 이가 멀쩡한 김 팀장. 오후 9시가 넘었지만 수십 장의 일기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해가 넘어간 지 꽤 됐지만 공기는 여전히 뜨겁다. 1층 로비 전광판은 서울 현재 기온을 29.2도로 나타냈다.
이날 기상청은 예보 6건, 특보 1건, 기상정보 3건을 발표했다. 밀양이 38.1도까지 오르는 등 15개 지역에서 올해 최고기온을 갈아 치웠다. 9개 시군에 폭염특보를 새로 발령하거나 조정했다. 박경희 예보관의 ‘서울 최고기온 33도’ 예보는 맞았을까. 다음 날인 13일 오후 4시 7분에 기록된 서울 최고기온은 32.9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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