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조센진(朝鮮人)’이라고 멸시할 때 오히려 이들을 사랑한 일본인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랑을 위해서라면 대한해협을 건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 여인은 가족 몰래 집을 나온 뒤 한국행 배를 타기 위해 보름 밤낮을 걸어 시모노세키(下關) 항에 도착했다. 딸이 조선인과 결혼하기 위해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안 부모님들은 충격에 쓰러지거나 딸과의 인연을 끊기도 했다. 사랑을 선택한 여인들의 인생은 험난했다. 자녀들이 학교에서 ‘쪽××의 자식’으로 불릴 때 가슴은 찢어졌고 남편이 ‘한국인 첩’을 들일 때면 하늘이 무너졌다. 남편 하나만 믿고 찾아온 한국에서 그렇게 60여 년을 살았다. 재한(在韓) 일본인 처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조선인 남자를 처음 만난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일본 후쿠오카(福岡)가 고향인 야기 지요(屋宜千代·88) 할머니는 1942년 이즈카(飯塚)시 탄광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었다. 이즈카 시에는 당시 미쓰비시(三菱)같은 대기업 뿐 아니라 아소 다로 전 총리의 부친인 고 아소 다카키치(麻生太賀吉)가 운영하던 탄광도 있었다. 야기 할머니의 부친은 갱도를 지탱하는 부목을 공급하는 일을 했다. 탄광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광부들은 조선 반도 전역에서 강제 징용된 남성들이었다.
탄광병원은 탄광에서 작업하다 다친 광부들이 치료받던 곳이었다. 야기 할머니는 갱도에서 다리를 다쳐 병원에 들어온 여섯 살 연상의 박모 씨(작고)를 처음 알게 됐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야기 할머니는 "당시 조선인 근로자와 일본인 여성과의 연애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주로 연애가 이뤄졌던 곳은 탄광 근처 함바집과 주막집. 당시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 남성들의 애환이 서려 있던 장소였다. 할머니는 박 씨가 다니던 탄광에 조선인이 1000여 명 가까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머니는 사람 좋고 성실했던 박 씨와의 결혼을 스무 살 때 결심했다. 해방되기 한달 전인 1945년 7월 20일, 두 사람은 신랑의 일이 끝난 늦은 밤 친구 집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했다. 세 자매 중 장녀인 할머니가 조선인과 결혼한다는 것을 극구 반대한 부모님은 결혼식에 오지 않았고, 친구들과 광산 근로자 약 50명만 참석했다. 그것도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검은색 커튼으로 방을 가린 채 진행됐다.
결혼식 후 광부들이 묵는 숙소에 신혼집을 차렸다. 숙소는 열악했지만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자체가 행복했다.
결혼 후 한 달 동안 아버지는 사위를 만나지 않았다. 딸을 안타깝게 여긴 어머니만 음식 등 이것저것을 딸이 묵고 있는 숙소로 가져왔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정오, 할머니는 '오봉(お盆·한국의 추석에 해당하는 일본 명절)'날을 맞아 처음으로 남편과 함께 친정을 방문해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때였다. 라디오를 통해 히로히토(裕仁)일왕의 나지막한 패전 인정 담화문이 들려왔다.
아버지는 사위에게 처음으로 "미안하다"라는 말을 짧게 하며 "빈집을 하나 마련해줄테니 딸과 함께 일본에서 살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박 씨는 "감사하지만 신세는 지지 않겠다"고 장인의 부탁을 정중히 사양했다.
광복 후 조선인 광부들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박 씨도 가족이 있는 전라도 나주로 가자고 아내에게 말했다. 할머니는 "당시 남편을 믿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가는 것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 해 11월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조선으로 가는 연락선을 타기 위해 하카다(博多)항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딸과 사위를 보기 위해 하카다항 근처까지 왔지만 미군들은 아버지가 한국으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해 항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딸과 사위가 떠나는 마지막 뒷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할머니도 그 시간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고향 나주에 돌아온 박 씨는 면사무소 호적 담당 공무원이 됐고 할머니는 간호조무사 출신답게 마을 사람들의 아픈 곳을 치료해주며 정을 쌓았다. 하지만 면사무소에서 일하던 남편의 외도가 시작되면서 할머니의 불행도 시작됐다.
급기야 남편은 작은 부인(첩)을 집에 들였다. 남편 친척들도 그런 행동을 비난했지만 박 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결혼 9년 만에 외동딸을 데리고 시댁을 떠나야만했다. 고난의 60년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외동딸은 어린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이국에서 혈혈단신이 된 야기 할머니는 나주와 목포 등지에서 식당 일과 식모살이 등으로 근근이 삶을 이어가다 2006년 경북 경주시 구정동에 있는 노인양로시설 나자레원에 들어왔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표류한 60여년
9일 기자는 나자레원을 찾았다. 야기 할머니처럼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남성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가 홀로 된 일본인 여성 23명이 사는 곳이다. 이들은 징용으로 끌려와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 유학생 등을 사랑해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건너와 한평생 이 땅에서 살았다. 현재 이들의 평균 나이는 90세. 한국 거주 연수만 따져도 60~70년을 훌쩍 넘는다.
할머니들은 대부분 현재도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다. 시부모가 "일본인 며느리는 절대로 집에 들일 수 없다"며 강경히 반대한 경우가 많았고, 바람을 피운 남편이 일본인 부인을 호적에 올리길 꺼린 사례도 있었다. 일부는 한국에 온 뒤 이미 남편의 본부인이 남편 호적에 버젓이 올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국에서 일본인으로 살기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광복 후 반일감정이 높았던 시절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에 있던 일본 사람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키기 위해 일본인 실태 조사를 했다. 이 때 할머니들은 자신이 일본 사람이란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이곳저곳에 숨어 있기도 했다. 반일 감정이 높아 혹시나 해를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터지자 할머니들도 피란을 떠나야만 했다. 또 자녀 교육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자기 자식을 한국인 첩의 자식으로 호적에 올려야만 했다. 남편의 호적에 자신이 올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녀가 학교에서 "쪽XX의 자식"이란 소리를 듣고 올 때는 가슴이 미어졌다. 일부 자녀들은 주변의 차별 어린 시선 속에서 탈선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일본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딸이 조선인과 결혼해 조국을 등지고 떠났다는 사실에 부모님들은 충격으로 쓰러졌고 딸과의 연을 끊었다. 형제들도 할머니들을 모른 체 하거나 비난했다.
할머니들은 자식을 데리고 식모살이 심지어는 막노동까지 하며 타국에서 홀로 힘들게 버텼다.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한국에서는 언어, 문화적으로 동화되지 못한 채 대한해협에 홀로 표류하는 나뭇조각처럼 60여 년을 이국땅에서 살아야 했다. 고(故) 김용성 이사장이 세운 '나자레원'은 반일감정이 팽배했던 1972년부터 힘든 생활을 하고 있던 재한 일본인 처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인 곳이다.
2001년 나자레원에 들어온 요네모토 도키에(米本登喜江·94)할머니는 요즘에도 글을 쓰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야마구치현립 시모노세키(下關)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할머니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사업을 하는 부모님이 머물고 있던 경상북도 대구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대구의 한 세무서에 취직을 했고 이곳에서 역시 일을 하고 있던 조선인 남성을 만나게 된다.
할머니의 부친은 할머니가 21살 때 눈을 감았다. 타국에서 아버지를 잃은 할머니는 어머니와 함께 장례 절차를 진행했다. 이 때 같은 세무서에서 일하던 그 조선인 남성이 할머니를 적극 도와줬다. 할머니는 "어려울 때 도움을 준 그 남성이 매우 고마웠다"고 말한다. 할머니와 그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고 2년간 연애를 한 뒤 결혼을 하게 된다. 할머니는 그 당시 남편이 "키도 크고 매우 잘 생겼다"고 회상한다.
할머니가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쉬웠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딸이 조선인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고 남성의 집에서도 역시 아들이 일본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극구 말렸다. 어머니는 공부를 더 하라며 할머니를 반강제로 야마구치현으로 다시 유학보냈다. 하지만 조선인 남성은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대한해협을 건너 야마구치 현까지 찾아왔다. 할머니는 놀랍고도 고마웠다.
하지만 할머니의 행복했던 결혼 생활도 남편의 외도로 끝이 났다. 남편은 다른 여성과 살림을 몰래 차렸고 얼마 뒤 할머니는 이 사실을 알았지만 모른체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공무원들의 풍기문란 행위를 엄벌하기 위해 중앙정보부에서 할머니를 찾아와 남편의 외도에 대해 물었지만 할머니는 모른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가슴은 미어졌다.
남편은 다른 여인에게서 자식을 넷이나 낳았다. 할머니는 자기가 낳은 딸과 고아 한 명을 입 양해 키우고 있었다. 남편과 그의 첩이 모두 암으로 사망하자 할머니는 첩의 자식까지 총 6명을 거둬 키웠다. 첩의 자식들도 3명이나 대학에 보냈다. 할머니는 일본 기업의 회사원들이 한국 근무를 할 때 이용하는 숙소에서 밥과 빨래를 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사위의 보증을 잘못 서 돈을 날리고 생활이 어렵게 돼 나자레원에 들어오게 됐다.
남편의 외도, 사망 그리고 반일 감정 속에서도 할머니들을 꿋꿋이 버티게 했던 것은 바로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정(情)'이었다. 할머니들은 "친척이라도 식사 시간에는 방문하지 못하는 일본인들과 달리 언제든 '밥 한 끼 먹고 가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말한다.
야기 할머니는 일본에서 나주로 왔을 당시 맵고 짠 한국 음식 때문에 밥을 잘 먹지 못했지만 시어머니가 밥에 뿌려 먹으라고 직접 만들어준 깨소금 볶음을 68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요네모토 할머니도 어려운 시절 주변의 한국인들이 진심으로 도와줬던 일들을 생각하며 한국에서의 한 평생을 "힘들었지만 행복했노라"고 뒤돌아본다.
한국과 일본의 유전자(DNA)를 모두 갖고 있는 할머니들은 식민지 시절을 겪은 한국인들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일본의 공영방송 NHK를 자주 보는 할머니들은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 등 정치인들의 잇따른 망언과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과격한 행동을 접할 때마다 "어쩌자고 그래, 한국하고 잘 지내야지"라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몇 년 전에는 치매를 앓고 있던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군가를 크게 불렀지만 주변의 할머니들 중 단 한 사람도 그 군가를 따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할머니들의 마음속에는 한국인들만이 갖고 있는 아픔의 감정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자레원 설립 이래 총 250여명의 일본인 할머니가 이곳에 왔고 1984년까지 147명이 일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최근 29년간은 이곳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할머니가 단 한 명도 없다. 80여 명은 이곳에서 눈을 감았다.
일본에서는 재한 일본인 처의 존재를 알고 여러 단체에서 데려 가려 했지만 할머니들이 번번이 거부했다. 할머니들은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떠냐"고 권할 때마다 "고향이 따로 있나. 정 뚫으면 고향이제"라며 "한국이 내 고향이고 한국인이 내 친구들이며 내가 현재 있는 나자레원이 바로 천국"이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앞장서 한국에 대한 홍보를 하고 있다.
재한 일본인 처. 그들은 일제시대가 낳은 역사의 또 다른 산 증인들이다. 기자가 떠나기 전 요네모토 할머니가 불러준 한국계 가수인 고(故)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명곡 '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구절이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산다는 것은 여행을 하는 것, 끝도 없는 이 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꿈을 찾아 가면서, 내리는 비에 젖어 진흙길이 되어도, 언젠가는 다시 갤 날이 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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