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2월 어느 추운 겨울날 고교 3학년이던 전월선은 일본 국립음대 입학원서 접수창구 앞에 망연자실한 채 서 있었다. 교직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전월선의 원서를 창구 밖으로 되밀었다. 전월선이 다니는 조선학교는 정식 고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월선의 머릿속으로 지난 1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의 사업이 갑작스레 부도나면서 삶이 달라졌다. 가족은 지방으로 흩어졌다. 전월선이 아끼던 피아노는 채권자의 손에 넘어갔다. 하지만 전월선의 꿈은 꺾이지 않았다. 홀로 도쿄(東京)에 남아 고교를 마치겠다고 고집했다. 알고 지내던 재일교포 할머니 집에 기거하며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었다. 대학 갈 돈은 없었지만 착실하게 수험 준비를 했다. 최소한 재능이라도 확인해보고 싶었다. 아버지 사업이 다시 풀릴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
재일동포 차별을 이겨내고…
그렇게 지내왔는데…. 수험 자격이 아예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뭐든지 노력하고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배웠는데, 일본인과 같은 하늘 아래서 태어나 지금껏 외국 한번 나가본 적이 없는데…. 전월선은 종일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다.
전월선은 다음 날 친분이 있던 일본인 음악 선생님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평소 전월선의 재능을 눈여겨본 선생님들은 전국의 음악대학을 수소문했다. 음대 명문인 도호(桐朋)학원대에서 실력만 있으면 받아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기회는 한 번이라고 했다. 죽을힘을 다해 준비했다. 마침내 1976년 봄, 전월선은 꿈에 그리던 대학 합격증을 손에 쥐었다.
좋은 일도 한꺼번에 이어졌다. 아버지는 재기했고 가족은 도쿄로 돌아왔다. 1980년 일본의 대표적인 오페라단인 니키카이(二期會)에 한국인 이름으로 당당히 입단할 수 있었다. 3년간 연구원(수습) 생활을 끝내자마자 1983년 독창회 무대가 마련됐다.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빠른 데뷔였다. 2년 뒤인 1985년에는 오페라 주역을 꿰찼다.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표현력이라는 격찬이 쏟아졌다. 차별을 이겨냈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해 어느 날. 전월선의 공연을 봤다는 총련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일성 북한 주석의 생일을 맞아 4월에 열리는 ‘평양축전-세계 친선 예술축제’에서 공연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총을 맞은 듯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에게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9년째 갇혀 있다고 전해들은 4명의 오빠가 있었다. 아버지는 다르지만 어머니의 피를 나눈 형제였다. 오빠들은 1959년경 니가타(新潟) 항에서 북송선을 탔다. 전월선이 두 살 때였다. 당시 조국 건설에 동참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재일교포가 북한으로 향했다. 오빠들은 이후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간첩혐의를 받은 뒤 수감됐다. 어머니는 홀로 있을 때마다 자식들과 찍은 사진을 몰래 꺼내보곤 했다. 누구냐고 물으면 먼 친척이라고만 했다. 어른이 되어서야 어머니의 가슴앓이를 알게 됐다.
초청을 받아들일지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영원히 못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컸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마침내 결심했다. ‘분단돼 있지만 남도 북도 내 조국이다. 피를 나눈 형제를 만나야겠다.’ 방북하면 오빠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총련 측에 미리 요청했다.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약속은 없었다.
1985년 4월 15일. 전월선은 김 주석 앞에 섰다. 무대 정면에 앉은 김 주석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앞에서 노래하는 전월선의 마음은 착잡했다. 공연 중에도 사진에서 본 오빠들과 어머니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김일성 주석 앞에서 공연
오빠들은 며칠 뒤 전월선이 머무르는 호텔로 찾아왔다. 3일간 특별휴가를 받았다고 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수용소에서 나와 산속 깊은 곳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둘째 오빠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알려주었다. 마지막 날 큰오빠가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를 전월선의 손에 건넸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한글로 꾹꾹 눌러쓴 편지였다.
편지를 받아든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숯덩이가 된 가슴이 다시 타들어갔다. 어머니는 총련에 호소해 3차례 북한을 방문해 아들들을 만났다. 오빠들은 어머니가 온다고 둘째 오빠의 묘를 만들어 놓았다.
그로부터 9년 뒤인 1994년 9월. 전월선은 서울에 첫발을 디뎠다.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 기념 오페라 ‘카르멘’의 주역으로 발탁된 것이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일이 이어졌다. 한 해 전 국적을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꾼 그에게 언론은 ‘귀화의 동기’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때마다 되받았다. “조선은 북한 국적이 아니다. 광복 후 재일교포는 모두 그렇게 분류됐다. 귀찮아서 그대로 뒀을 뿐이다. 우리에겐 남이나 북이나 모두 조국일 뿐이다.”
전월선이 한일 양국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기 위해 무대에 올리려던 일본 노래 ‘요아케노 우타(夜明けの唄·새벽의 노래)’도 거부당했다. 일본에서도 이방인이었지만 한국에서도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사무쳤다. 그는 공연을 마친 뒤 아버지의 고향 경남 진주를 찾았다. 아버지는 15세 때 징용돼 일본에 끌려왔다. 친척들과 함께 처음 할머니 묘소를 찾았다.
그의 노래에 눈물바다로…
그나마 작은 평안을 얻고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노래 한 곡에 사로잡혔다. ‘남이나 북이나 그 어디 살아도 다같이 정다운 형제들 아니런가. 동이나 서이나 그 어디 살아도 다같이 정다운 자매들 아니런가∼.’ 재미교포 치과의사 노광욱 씨가 작사 작곡한 ‘고려산천 내 사랑’이었다. 무대에 설 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다. 그때마다 어머니와 오빠, 남과 북으로 갈라져 못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소문을 듣고 공연장을 찾은 대한민국 민단과 총련 인사들의 감은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2002년 6월 전월선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주최한 김대중 대통령 환영 만찬 무대에 섰다. 한일월드컵축구대회 폐막 기념 행사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아리랑’과 일본 노래 ‘후루사토(故鄕·고향)’를 나란히 불렀다. 이후 그에게는 ‘북한, 한국, 일본의 3개국 정상 앞에서 노래한 유일한 가수’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2004년 2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북한을 방문한 고이즈미 총리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했다는 뉴스였다. 북한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이 급격히 악화됐다. 일본인을 상대로 ‘고려산천 내 사랑’ 등 한반도의 평화를 노래하던 그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어느 날 일본인 납치 피해자인 요코다 메구미(橫田めぐみ) 씨의 부모가 공연장을 찾았다는 귀띔을 받았다. 이 자리에선 자신 있게 노래할 자신이 없었다. 간신히 공연을 마치고 도망치듯 일본을 떠났다. 마침 루마니아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공연이 잡혀 있었다.
유럽을 전전하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급거 귀국했다. 2005년 2월 어머니는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어머니는 전월선에게 유언을 담은 녹음테이프를 남겼다. “나는 내 아들들이 저런 곳에 가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년 만이라도 같이 살아보고 싶었는데. 너무나 애달프고 슬프고 분해서 이대로 돌아갈 수 없어…. 왜 이런 고생을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지. 자기 나라가 둘로 나뉘어서, 여기에 원인이 있는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전월선은 저도 모르게 나지막하게 노래를 불렀다.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을/ 애달피 가슴에 묻은/ 나는 이 나라의 슬픈 에미’(정치근 시/박상중 작곡). 뺨에는 눈물이 타고 흘렀다.
“소나기가 그치면 무지개 떠오르죠”
어머니를 잃은 전월선은 쫓기듯 컴퓨터 자판을 두들겼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묻어 놓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침 일본 유명 출판사인 쇼가쿠칸(小學館)이 작품을 공모하고 있었다. 데드라인을 앞둔 전월선은 밤잠을 잊었다. 2006년 8월 25일. 전월선이 탈고한 ‘해협의 아리아’가 논픽션 대상을 수상했다. 기성 작가가 아닌 일반인, 더구나 가수가 이 상을 수상한 것은 처음이었다.
책은 큰 화제를 모았다. 일본인 독자들은 납북 피해자 가족들을 초청해 전월선의 무대를 마련했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객석에 앉은 요코다 씨의 부모는 손수건을 꺼내 계속 눈물을 닦았다. 공연이 끝나자 전월선을 찾아 와 힘내라고 격려했다. 그날 이후 전월선은 해마다 ‘해협의 아리아’라는 타이틀로 공연을 이어갔다.
어느덧 올해로 노래 인생 30주년을 맞았다. 하필 요즘 한일 관계는 과거사와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찬바람이 불고 있다. 전월선은 그래도 낙관적이다. 한류 드라마가 계속 방영되고 있고, 케이팝(한국대중가요) 스타들의 인기도 여전하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다. 정치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문화의 힘, 교류의 힘은 이렇게까지 서로를 가깝게 만들었다.
전월선은 31일 오사카(大阪), 10월 12일 도쿄에서 30주년 기념 공연을 갖는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서곡일 뿐이다.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다. “여건이 되면 고향인 진주나 서울에서도 30주년 기념 공연을 하고 싶어요. 가족사를 담은 책 ‘해협의 아리아’ 한국어판도 발간하고 싶어요. 진주가 배경인 오페라 ‘논개’를 한일 양국에서 공연해 보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습니다.”
긴 이야기가 끝나고 도쿄에 있는 전월선의 음악실을 나서려는 순간 소나기가 쏟아졌다. “소나기가 그치면 무지개가 피어오르죠.” 전월선의 인생을 함축한 듯한 인사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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